시집에서 읽은 시

과거에 시작된 광포한 빗줄기/ 장석원

검지 정숙자 2017. 7. 10. 02:31

 

 

    과거에 시작된 광포한 빗줄기

 

     장석원

 

 

  빗줄기가 문신을 새길 듯이 박힌다

 

  돌아설 수 없기에 强者가 아닌

  나의 출발은 미미하나 파국은 황홀하다

  뒤돌아보는 순간 기억에 갇혀 있던 천 겹의 나뭇잎

불타오른다

 

  한 시절의 침묵처럼

  가늠쇠에 내려앉는 검은 나비

  불꽃에 찢어지는 검은 나비

  상처 속에 산 채로 묻혀 있던

  검은 나비

 

  (다른 날의 그대 잠들라 그대는 증발하여 산정으로 돌

아가라 끝없이 흘러내리는 자 원인도 없고 결과도 없는

한 줌의 공허 앞에서……)

 

  나를 점령했던 어둠이 침몰하고 새벽이 다가온다

  나는 이마를 관통하는 물방울조차 알지 못하지만

  흐르는 모든 것들에게 경의를 표해야 한다

 

  치솟으며 하강하고 솟구치며 침몰하고 상승하며 추

락하는 자여 낙하하며 창공을 제압하는 날개 꺾인 자

여 나의 그림자여

 

  검은 나비 나를 따라오고

  검은 나비 나를 포위한다

  나의 검은 혓바닥 그대를 서술한다

 

  그대여 나는 흘러가서 돌아오지 않으리 흩어지는 구

름이 되리 그때

  그대는 나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었으나 그 가치를

알기에 나는 너무나 어리석었을 뿐

  나를 만든 자 나일 뿐이니 그대가 선사한 통증 나의

철갑이 되리 그때

  그대는 血肉을 되찾아 내려올 것이며 다시 나의 짐

을 질 것이다

 

  과거가 움켜쥐었다가 내던진 마지막 햇빛처럼

  태양을 향해 눈 돌리는 400일의 어둠처럼

  남겨진 한 줌의 어둠처럼 이곳과 저곳에서

  過去와 未來에서 얼굴 내미는 나를

  나는 잊으려 한다

  즐거운가?

  통치되고 더럽혀지며 나는 견뎌왔다

  자랑스러운가?

 

  400일 동안 내리던 빗줄기, 400일이 지나도 썩지

않는 액체의 응집 그리고

 

  나 죽을 때 비 내렸다

  끝없는 직선이 나를 가로지른다

 

  파괴된 평형

 

  소멸되기를 기다리는 아픈 별처럼

  누워 있는 얼굴 위로

  검은 나비 날아온다 

    -전문-

 

 

  해설> 한 문장: 오랫동안 시는 독백에 해당하는 장르였다. 시에서 주체는 만상을 자신을 비추는 거울로 세워둔다. 주체가 하는 모든 행위에는 대상 곧 타자가 있지 않느냐고? 없다. 타자는 주체가 목적어 자리에 자신을 둘 때 생겨나는 또 다른 주체일 뿐이다. 내가 사랑하면 내가 사랑받고, 내가 버리면 내가 버림받는다. 타자는 거울에 비친 주체의 왜곡된 상에 지나지 않는다. 주체와 타자의 왕복이 있는 게 아니라, 주체와 변장한 주체의 교환이 있을 따름이다. 시에는 하나의 목소리만 있다. 타자의 목소리는 복화술사의 변성變聲과 같은 것이다. 어조의 강력한 힘은 여기서 나온다. 시는 태어났을 때부터 음악을 품고 있었는데, 이때의 음악이란 끊임없이 재귀하는 목소리로서의 그것이었다. 특별한 패턴을 가진 말이란, 그 패턴을 지닌 발화의 주체에 종속되는 말이다. 비유 역시 그렇다. 하나의 사물과 다른 사물을 강제로 잇는 비유의 원력은, 그 사물들 위를 선회하는 특별한 지배자, 곧 주체가 지닌 힘이다. 시의 주체는 무시무시한 독재자다. 거기엔 진정한 의미에서의 타자가 끼어들 틈이 없다./ 장석원은 바로 이 점을 의심하는 데서 시를 시작한다. (……) 장석원의 시에서 어조와 화자 분석이 어렵고 시 전체를 관할하는 비유적인 틀이 마련되지 않는 것은 이런 사정에서다. 진정한 의미에서의 타자란, 주체의 발언에 종속되지 않는 이질적인 발언자들이다. 이질적인 발언은 주체의 것과는 다른 세계관, 다른 계급의식, 다른 이데올로기를 시에 끌고 들어온다. 여러 세계가 충돌하고 뒤섞이고 공명하고 배척하여 화음이나 불협화음을 내는 세계가 여기에 있다. 장석원이 이 세계의 발언자로 아나키스트를 내세운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아나키스트는 조직과 체계를 인정하지 않으며(시적 실천의 측면에서도 물론 그렇다), 그래서 위계를 거부하고(일례로 그에게는 하위문화와 상위문화의 구별이 없다), 개인적 실천으로 혁명을 도모하고자 한다(그에게는 전복 자체가 사랑이다). 시인은 아나키스트의 모습으로 타자를 찾아나섰다. (권혁웅/ 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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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시집『아나키스트』에서/ 초판 1쇄 발행 2005.11.30. 초판 4쇄 발행 2009. 2. 2. <(주)문학과지성사> 펴냄

  * 장석원/ 1969년 충북 청주 출생, 고려대 국문과 및 동 대학원 졸업, 2002년 대한매일(현 서울신문) 신춘문예로 등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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