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아기는 나오려 하지 않는다
노준옥
열 달이 열 번이 지나고 십 년이 열 번이 지났는데도,
이 아기는 나오려 하지 않는다
깜빡깜빡 눈도 생기고 머리카락도 생겼는데
이 아기는 나오려 하지 않는다
손발도 생기고 손톱 발톱도 다 만들어졌는데
이 아기는 나오려 하지 않는다
나는 숨도 못 쉬고 아무 데도 가지 못하는데
이 아기는 내 심장에 들러붙어 할딱인다
양수는 터져 다 흘러가버렸다
자궁은 문이 닫혀버렸다
이 아기는 이제 더 이상 크지 않는다
이 아기는 울지 않는다
이 아기는 웃지도 않는다
이 아기는 말도 못하고 노래도 부르지 못한다
이 아기는나오지 않는다
이 아기는 날마다 나를 빨아 먹고 잠을 잔다
탯줄을 감아쥐고 물끄러미 날 쳐다본다
이 아기는 나오려 하지 않는다
열 달이 열 번 지나고 십 년이 열 번 지나도
이 아기는 도대체 나오려 하지 않는다
-전문-
해설> 한 문장: 인터넷에서 놀라운 사진을 목도한 적이 있다(「얼어붙은 파도」, 출처- 해외커뮤니티). 그것은 얼어붙은 파도에 대한 사진이었다. 사진 속의 얼음은 산 만한 크기였는데, 푸른색을 띠면서 마치 금방이라도 세상을 집어삼킬 기세였다. 다만 여타의 쓰나미와 다른 점은 그 파도가 당분간 움직일 수 없는 상태라는 점이다. 왜냐하면 그 파도는 얼어붙어 있어, 산처럼 고정되어 있기 때문이다. 지상이라고 해봐야 그 역시 얼음일 테지만 말이다. 왜냐하면 이 얼어붙은 청록색의 파도이자 산은, 남극에서만 발견된다고 한다./ 이 사진은 나에게 큰 영감을 주었다, 처음에는 그 영감이 무엇인지 몰랐다. 아름답고 신비하고 또 약간 모호한 이미지려니 했다. 사실 파도가 얼어붙는다는 사실은 증명하기 힘들지 않겠는가. 그 이후 몇 번이나 그 사진을 보게 되었다. 인터넷 서핑을 통해 만나기도 했고, 생각이 나면 저장된 사진을 꺼내 보기도 했다. 그러면서 이러한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아무리 추운 남극이라고 해도, 움직이는 파도가 얼어붙을 수는 없다'
하지만 이런 가정은 어떨까. 그 파도가 얼어붙을 수 있다면, 놀랄 만큼 빠르게 움직이는 파도를 얼어붙게 만드는 기습적인 강추위가 존재한다면, 어떤 풍경이 연출될까.
파도가 언어라면, 시는 얼어붙은 파도라고 할 수 있다. 세상에 흐르는 단어들, 문장들, 표현들, 그리고 이를 총괄하는 언어들, 그 언어들은 어떤 순간 정지된다. 얼어붙듯 멈추고, 순간적으로 박제된다. 조용히 죽어간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그것이 시이다. 일상을 흐르던 언어들이 조용히 멈춰 그 자리에 얼어붙는 현상, 처음에는 일상의 언어였지만, 일상의 언어가 시가 되는 순간 더 이상 평범한 언어의 나열일 수는 없다. (김남석/ 문학평론가, 부경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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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집『모래의 밥상』에서/ 2011.6. 22. <시와사상사> 펴냄
* 노준옥/ 부산 출생, 2001년 『시와사상』으로 등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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