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집에서 읽은 시

검은 나무/ 장석원

검지 정숙자 2017. 7. 7. 02:36

 

 

    검은 나무

 

    장석원

 

 

  나는 방금 전에 검은 나무를 지나쳤다

  그는 견고한 기둥이 아니다

  어둠에 먹힌 그가 꽃을 밀어낸다

  꽃잎 꽃잎 꽃잎 터져 나오는 꽃잎

  어둠을 빨아 마신 검은 나무의 검은 언어

  나에겐 검은 나무를 기술할 검은 혀가 필요하다

 

  어둠 속의 나무는 따스하지만 또한 나를 찌른다

  검은 나무의 폭력에 몸이 열린다

  그가 전해주는 검은 사랑을 나는

  갉아먹는 환한 꽃으로도

  베어내는 칼날로도

  부정할 수 없다 내게는 힘이 없다

 

  왜 검은 나무 앞에서 나의 소음을 듣고  있는가

 

  검은 나무가 나를 설명한다

  거부된 자이기에 돌아오지 않을 나를 기술하는 검은

나무의 목소리가, 희미한 체취가

  빠르게 궤멸되었던 두 감각이

  교차되면서 교란되면서

  나를 실체라고 주장한다

  나는 속기로 작정한다

 

  검은 나무가 걸어온다

  나는 어둠이 가득 찬 주머니

  그가 내게 손을 대자 나는 주르르 쏟아진다

  어둠의 성채로 흘러드는 길이 된다

 

  그물을 펼치고 그의 모든 이미지를 포획하려 한다

그리고

  종말을 향해 첫걸음을 떼었다

  검은 공포가 서 있다

    -전문-

 

 

  해설> 한 문장 : 위협과 유혹은 종종 동시에 발생한다. 그러나 우리가 그것이 유혹과 함께 하는 위협이었다는 것을 승인하는 것은 한참이나 사후의 일이다. 또 다른 사후작용retroaction이 있고서야 비로소 우리는 이전에 있었던 사건의 의미에 대한 해석을 내린다. 즉, 이전 사건의 의미들은 사후작용에 의해 소급적으로 결정되고는 한다. 주지하듯, 라캉 J. Lacan의 '누빔점point de capiton' 개념은 바로 이로부터 비롯된 것이다. 문장의 의미이건 사태에 대한 해석이건 그 최종 심급의 결정은 어떤 계기를 통해 역방향으로 순차적으로 이루어진다. (조강석/ 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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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시집『태양의 연대기』에서/ 초판 1쇄 발행 2008.11.27. 초판 2쇄 발행 2012. 10. 19. <(주)문학과지성사> 펴냄

  * 장석원/ 1969년 충북 청주 출생, 고려대 국문과 및 동 대학원 졸업, 2002년 대한매일(현 서울신문) 신춘문예로 등단, 시집 『아나키스트』, 평론집『낯선 피의 침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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