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책
강문출
공책 한 권을 선물 받았다
스마트폰 시대에 공책이라니
싫든 좋든 주관식 문제가 출제되었다
글쓰기는
말뚝 없는 공터에다
가장자리를 빙빙 도는 고삐 없는 송아지를 잡아매는 일이
거나
쌀통 옆에 쭈그리고 앉아
끈기 있게 쌀 포대를 푸는 일
자르는 대신 손가락가위를 구부려 첫 올만 잘 찾으면
그 다음은 슬슬 풀려나가는
써 없어지기보다 찢어 없어지기 쉬운
애벌레가 꼬불친 날개를 펼치는 일 같은
방바닥에 널브러진 종이꽃봉오리 가운데 하나가
세게 뭉쳐진 하나가 먼저 피는 것처럼
그렇게 와 닿은 생각이 공책을 채우는 것이다
삽시간에 나는
종이층층나무 몇 페이지를 넘기고 있다
-전문-
해설> 한 문장: 시로써 우리는 무엇을 할 수 있을까? 시의 기능에 대한 해묵은 물음이지만 시인으로 사는 사람이나 그것을 지켜보는 비평가에게 이 물음은 늘 현재의 자신의 삶에 의미 있게 살고 있는가 하는 것을 되새겨보게 한다는 점에서 무겁고도 무서운 질문이라고 할 수 있다. 이 물음은 곧잘 시의 본질은 무엇일까 하는 것으로도 전화되는 성질이 있어 쉬이 답을 하기가 어려운 것이 사실이다. 그 대답은 세계 속에 실현되고 있는 자신의 삶과 맞물려 있는 만큼 자기 이해와 더불어 세계 이해에까지 도달해야 하기 때문에 어렵고 힘든 일일뿐 아니라, 사람들마다 자기 생각을 다양하게 내놓을 것이란 점에서 모호하기 짝이 없다./ 그렇다고 그 대답을 못 내릴 것까지는 아니다. 후기 산업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로서 당대의 사회현실에 대응하는 기제로서 시의 기능과 시인의 역할에 대해 생각해보지 못할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그럴 때, 시는 사물화, 상품화로 치닫고 있는 후기산업시대의 반생명적 세태에 대한 응전으로 존재의 본질에 대한 성찰을 유도하는 측면을 우선적으로 고려해 볼 수 있다. 시는 생명의 본질에 대한 발견과 그것의 실현을 위한 실천으로서 의미를 가지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이는 우리시대의 시에 대한 정의와 기능을 다 아울러 말하는 것이다. 정말, 우리 시대의 시는 자본의 논리로 사물화되어 가는 생명의 실상에 대한 발견과 그것의 성찰을 통한 존재의 승화에 있다고 할 수 있지 않을까. (김경복/ 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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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집『낮은 무게중심의 말』에서/ 2017.6.20. <리토피아> 펴냄
* 강문출/ 부산 기장 출생, 2011년『시사사』로 등단, 시집『타래가 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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