숲
조정인
검고 긴 총신이 질주하는 멧돼지를 향해 겨눠진다, 갈참나무 숲 사이
길
폭풍처럼 화려한 화약의 꽃이 사라진 지점은 잠잠하다 덩치 큰 슬픔
이 모로 쓰러진 곳으로 달려간 숲의 고요가 슬픔의 어깨를 흔든다 슬픔
을 보듬어 털복숭이 왼뺨에 오른뺨을 댄다 슬픔의 눈꺼풀을 쓸어내린다
들쳐 업고 뛰기엔 너무 늦어버린, 물로 씻은 약사발처럼 아무것도 뒤져
낼 수 없는 막막한 구급상자
총의 개념은 신석기시대 바람 부는 숲에서 세워졌다 한다, 휨의 일관
성으로 방향을 보존하는 숲에서 비틀림의 에너지를 지켜보는 석기인의
순결한 희열을 나는 상상한다 순결은 분별이 끼어들기 이전*의 순간몰
입상태 불현듯 눈이 멀어 전신이 눈이 되는, 신성의 얼굴과 마주한 백열
상태
나는 지금 흔들리는 숲에서 한 사람을 그리워한다, 검은 수염에 뒤덮
여 그는 다만 숲의 고요를 목도중일 것이다 숱 많은 눈썹 위로 숲의 빛
이 내려쌓일 것이다 깜깜한 진흙반죽으로부터 고대인을 통과하여 영원
히 인간게놈 정중부에 꽂히는 빛의 화살촉 신성은 자신의 관성으로 인
간과 인간, 사물과 사물을 관통하며 시제는 현재다
* 마이스터 엑카르트(독일 1260~1327): ‘순결이란 원죄나 이분법 분리의식이
싹트기 전의 존재 상태를 가리킨다. 그것은 우리의 원초적인 자유를 의미한다.’
에서 영향을 받음.
-------------------------------------------------------
-『현대시』2011-3월호 <신작특집>에서
- 조정인/ 서울 출생, 1998년『창작과비평』으로 등단
'잡지에서 읽은 시' 카테고리의 다른 글
대학강사무(舞)/ 이동재 (0) | 2011.03.15 |
---|---|
울음의 내부/ 정채원 (0) | 2011.03.10 |
보았나? 진짜 진짜 웃음을 보았나!/ 노혜봉 (0) | 2011.03.10 |
자비 출판/ 이화은 (0) | 2011.02.19 |
별이 별똥이 되기까지/ 황희순 (0) | 2011.02.18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