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러 파트의 글

순수한 낙원은 없다/ 권택영(權澤英)

검지 정숙자 2017. 5. 7. 01:50

 

  『문학사상』2017-5월호/ 세기의 문 · ·

 

 

    순수한 낙원은 없다

      슬라보예 지젝의 외설적 아버지

 

 

     권택영權澤英/ 문학평론가, 경희대 영어영문학과 명예교수

 

 

 

  하루는 밤과 낮으로 이어지고 계절은 더워지면 다시 추워진다. 삶은 어떻게 지속되는가. 만물은 태어나면 죽고 죽으면 다시 태어난다. 심리학에서는 마음조차 이성과 감정의 상호작용이라고 밝힌다. 이처럼 세상만사를 움직이는 것은 두 개의 대립되는 힘들의 상호작용이다. 때문에 니체는 이성과 질서의 상징인 아폴론보다 감성과 혼동의 상징인 디오니소스를 우위에 놓았고, 헤겔은 삶보다 죽음을 우위에 놓아 삶과 죽음의 변증법을 주장했다. 그리고 프로이트는 의식보다 무의식의 힘이 더 거대하다고 증명했다. 물론 최근의 심리학도 예외가 아니어서 감성이 이성보다 더 근원적이고 강하다고 말한다.

  어째서 헤겔, 니체, 프로이트는 비슷한 담론을 되풀이할까? 그들은 사회 역사적 맥락에서 독창적 이론들을 발견하고 다른 방식으로 서술했지만, 가만히 들여다보면 모두 비슷한 면이 있다. 세상은 두 개의 대립 항이 하나의 힘으로 연결되어 지속된다는 것이다. 뫼비우스의 띠를 연상시키는 '이원적 일원론'이다. 그렇다면 왜 우리는 비슷한 가설을 반복하는 철학자, 심리학자, 뇌과학자가 필요한 것일까. 그들이 같은 말을 되풀이해도, 우리가 매번 마치 들어본 적 없는 것처럼 독창적이라고 받아들이는 이유는 무엇일까. 이유는 우리가 거꾸로 배워왔기 때문이다. 학교 교육은 혼동보다 질서를, 죽음보다 삶을 존중하도록 학습시키고 단련시킨다. 문명은 진보와 합리성에 뿌리를 내리고 발전해왔다. 그래서 프로이트가 아무리 거대한 무의식이 있다고 증명해도 우리는 자동적으로 혼동보다 질서를, 밤보다 낮을, 무의식보다 의식을 주인으로 대접하기 마련이다.

  우리는 진실과 반대로 살고 있다. 착각에 빠져 살면서도 정확하게 산다고 오해한다. 그래서 이들 사상가들이 난해하게 느껴진다. 이것이 프로이트에 대한 많은 오해가 일어나고 라캉의 글이 수수께끼 같고 지젝의 글이 알 듯 말 듯 느껴지는 이유이다. 진화는 편의상 사물을 단순화시키고 정확성과 순수함을 추구하도록 우리를 길들인다. 그러나 얼룩이 없는 파라다이스는 없다. 얼룩으로 살아남은 무의식에 대하여, 그것이 어떻게 가능했는지 살펴보자.

 

 

  지젝의 마르크시즘 비판

  지젝은 과거 공산국가였던 동유럽의 슬로베니아 출신이다. 그 영향으로, 그는 정신분석을 마르크시즘과 연결한다. 무의식의 창시자 프로이트는 프랑스의 정신분석가 자크 라캉에 의해 새롭게 해석되었고 알튀세와 들뢰즈를 비롯한 그의 제자들은 프랑스 철학자들로, 미국의 포스트모더니즘에 큰 영향을 미쳤다. 지젝은 이들과 노선을 달리하여 독일 철학의 전통 속에서 라캉을 이어받았다. 그는 데리다와 버틀러 등이 주장한 미국과 프랑스의 포스트모더니즘을 비판하면서 라캉이 그러했듯이 헤겔을 끌어안았다. 라캉을 스승으로 삼은 제자들 가운데 최근 지젝이 가장 공감하는 철학자는 자본주의 비판자로 알려진 알랭 바디우Alain Badiou이다. 엄밀히 말해 이 두 사상가는 공산주의 편이 아니다. 오히려 민주주의 편이고 자본주의 편이다. 그들이 싫어하는 것은 극단적인 파시즘이다. 극단에 치달으면 반대성향이 나타나기 때문이다.

  지젝이 서구에 널리 알려진 계기는 그의 첫 번째 저서 『이념의 숭고한 대상The Sublime Object Ideology(1989) 이었다. 그는 프로이트의 꿈의 해석과 마르크스의 자본주의 비판을 나란히 놓는다. 프로이트는 환자가 앓고 있는 병의 원인을 찾기 위해 과거의 경험과 꿈 이야기를 들었다. 그런데 꿈을 이야기로 전달하는 과정에서 이야기는 현재의 욕망에 의해 왜곡된다. 이것은 기억이 현재 욕망의 산물인 것과 마찬가지다. 의사는 또 현재까지 자신의 경험에 비추어 환자의 이야기를 해석한다. 이런 전이의 과정을 거쳐 찾아낸 병의 원인은 사실과 거리가 멀다. 병의 원인은 대화의 결과물이다. 다시 말하면 원인이 결과에 의해 얻어진다는 것이다. 원인과 결과가 뒤바뀐다. 이미 라캉이 잉여 주이상스를 잉여가치로 보면서 마르크시즘을 비판했으나 지젝은 이 부분을 한 권의 책으로 발전시켰다.

   마르크스는 잉여가치(이윤)글 얻기 위해 상품을 생산하고 상품의 생산주기가 빨라지면서, 결국 자본주의가 노동의 대가와 상품이 일치하는 '사용가치'에 의해 몰락할 것이라고 암시하였다. 그러나 실제 소련의 공산주의 혁명은 실패로 끝났다. 인간은 이익이 남지 않으면 생산 활동을 하지 않는다. 추구하는 목표가 없으면 살 욕망이 생기지 않는 것과 같다. 결국 사용가치란 실제로는 존재하지 않는 허구였다. 마치 병의 원인이 대화의 결과물로 얻어지는 허구인 것과 같다. 잉여가치는 생산 활동이 일어나는 동력이고 잉여쾌락은 욕망의 동력이었다.

  프로이트는 리비도를 인간이 삶을 영위하는 원초적 동력으로 보았다. 그리고 이 힘을 성적이고 공격적이라고 말한다. 인간은 동물로부터 진화하였다. 이 동물적 본성은 문염에 의해 억압되지만 여전히 거대한 무의식으로 의식 속에 위장되어 나타난다. 본능이라는 쾌락원칙은 문명이라는 현실원칙과 타협하지만 더 큰 힘으로 살아남아 의식을 조정한다. 라캉은 리비도를 '주이상스 jouissance'라는 용어로 대치하였다. 그리고 헤겔의 죽음과 삶의 변증법을 프로이트의 죽음충동과 연결했다. 쾌락원칙을 넘어 만물의 근원인 죽음충동이 있다는 프로이트의 말은 리비도의 특성이 마조히즘적인 공격성이라는 말과 같다. 죽음은 삶을 낳는 근원이며, 살기 위해 지불하는 대가이다. 죽음이 삶의 주인이라는 헤겔의 변증법을 끌어들인 라캉은 삶 속의 잉여로서 존재하는 죽음을 '실재계 the Real'라고 이름 붙였다.

  삶을 움직이는 죽음충동의 여분인 '실재계'는 자본주의에 대입하면 잉여가치가 되고 욕망에 대입하면 숭고한 대상이 된다. 라캉은 실재계를 삶 속에 들어와 삶을 지속시키는 숭고한 대상, 즉 욕망의 미끼(오브제 프티아) 라고 불렀다. 우리는 삶의 목표 혹은 사랑하는 연인을 얻기 위해 열심히 일한다. 그러나 그 대상을 얻고 나면 순간의 만족은 사라지고 더 높은 대상을 향해 다시 뛴다. 숭고한 대상은 죽음이 베일을 쓰고 우리를 유혹하는 허상이다. 이것이 욕망의 주체이다. 프로이트는 말한다. 죽음만이 영원한 결핍감을 충족시키는 대타자라고.

  라캉이 욕망의 주체를 결핍으로 보는 것에 비해 지젝은 여분, 혹은 잉여로 보았다. 지젝이 삶 속의 죽음을 결핍보다 잉여로 본 것은 숭고한 대상을 잉여가치로 보았기 때문이다. 자본주의의 잉여가치는 허상이지만 그 이념은 절대적이다. 그것 없이는 사회와 법이 존립하지 않고 그것 없이는 개인의 자유도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그가 결핍보다 잉여를 택하는 또 다른 이유는 바로 이 숭고한 대상, 혹은 아무것도 아닌 절대성이라는 실재계가 '지나치게' 넘칠 때 이념이 파국을 맞이하기 때문이다.

 

 

  외설적 아버지

  '페티시즘fetishism' 이라는 프로이트의 용어가 있다. 원래 페티시란 어머니를 대체하는 물건으로, 성인이 되어서는 연인을 대체하는 물건이다. 이것을 자본주의 현상에 대입하면 소비가 되기 전에 다른 상품이 나오는 물신주의적 현상이다. 생산주기가 빨라져서 상품이 숭고한 대상이 아니라 쓰레기로 전락하는 것이다. 패션의 주기가 빨라지는 것을 예로 들 수 있다. 예전에는 옷을 사면 유행이 몇 년씩 지속되었다. 그러나 지금은 주기가 빨라서 하나의 패션이 채 사라지기 전에 다른 패션이 나타난다. 상품이 승화되기 전에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되어버리는 현상이 페티시즘이다. 이 현상이 위험한 것은 쓰레기가 양산되고 어느 시점에 이르면 소비가 침체되어 물건이 더 이상 팔리지 않게 된다는 점이다. 자본주의는 개인의 권리를 존중하는 민주주의와 벗이지만 삶과 죽음이 균형을 취하지 못하면 파국을 맞는다. 기술의 발달이 지나칠 때도 마찬가지다. 자동화의 실업은 동전의 양면이어서 앞의 것을 지나치게 추구하면 뒤의 것이 나타난다. 반전이다.

  지젝의 용어로 페티시즘은 '외설적 아버지'다. 프로이트는 문명의 시작을 '죽은 아버지'로 설명하였다. 원시시대에 아버지는 쾌락과 권력을 독점하였다. 이것이 외설적 아버지다. 아들들은 아버지를 죽이고 권력을 차지했으나 분열이 일어나고 암투가 벌어진다. 이런 혼란을 해결하기 위해 아들들은 동물을 정하여 절대 권력을 부여한다. 질서를 세우기 위해 아버지를 대신한 동물이 토템이다. 토템은 죽은 아버지지만 절대적인 권력을 가지고 사회를 다스리는 기준이 된다. 죽은 아버지는 질서를 위해 세운 법이다. 그러므로 법의 원형은 외설적 아버지였다.

  죽음이 삶 속에 들어와 주인노릇을 하듯이 외설적 아버지는 법속에 들어와 잉여쾌락이 된다. 잉여쾌락이 숭고한 대상이 되어 적절한 속도로 추구되어야 욕망이 지속된다. 법을 지나치게 밀어붙이면 쾌락을 독점하던 외설적 아버지가 원래 모습을 드러낸다. 라캉은 법을 그토록 잘 지키는 독일에서 나치즘과 유태인 학살이 일어난 것을 이 원리로 설명하였다. 법과 명령을 지나치게 밀어붙이면 사디즘적 쾌락으로 향하게 된다. 나치즘은 사도마조히즘적 복종의 쾌락을 불렀고 결과는 파국이었다. 칸트의 이면은 사드였다. 죽은 아버지와 외설적 아버지는 동전의 양면(혹은 뫼비우스의 띠)을 이루고 있어서 한 쪽을 밀어붙이면 반대쪽이 나타난다.

  영화분석과 독일 철학의 전통에서 라캉을 읽은 지젝은 2000년대에 오면서 정치와 경제의 현상에 눈을 돌린다. 『자본주의에 희망은 있는가Trouble in Paradise(2017)에서 지젝은 죽은 아버지를 '마스터'라고 부른다. 마스터는 토템처럼 그 자체로는 아무 것도 아닌 허구다. 하지만 사회가 질서을 위해 세운 지도자이기 때문에 그는 절대적 권한을 부여받는다. 그리고 마스터의 이면은 외설적 아버지이므로, 시간이 흘러 극단이 되면 반대 경향의 마스터가 나타난다. 마치 더위가 극에 달하면 추위로 방향이 바뀌는 것과 같다. 위의 책에서 지젝은 영국 수상, 마가렛 대처의 이미지를 예로  든다. 그녀의 강력한 자본주의 육성책은 성공했지만, 시간이 흐른 지금은 그와 정반대의 마스터가 필요하게 되었다. 마스터는 죽은 아버지로서 절대성을 띠고 임무를 성공적으로 수행한다. 그가 절대 권력으로 성공할수록 반전이 빨리 나타난다. 바디우는 이런 반전을 '사건'이라 말하고 패러다임의 전환으로 설명했다.

  지젝이 말하는 또 다른 반전의 예를 보자. 에델만은 유대인으로 이스라엘을 지지했으나 이스라엘의 힘이 너무 커져 독재가 되자 현재는 박해 받는 팔레스타인을 지지했다. 어떤 정치적 이념도 극단으로 내달리면 빠르게 반전이 일어난다. 예를 들어 삶의 목표를 향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빠르게 추구하면 그것이 허상이라는 것을 빠르게 느끼게 되고 다시 또 다음 목표를 추구하게 된다. 생산주기가 빠르게 순환하여 상품이 쓰레기로 변하는 것과 같다. 삶은 목표에 이르는 과정이 전부이고 그 과정을 즐기면서 천천히 가는 것이 지혜다. 목표는 숭고한 대상이지만 잡으면 허상이라는 것을 알고 과정을 즐기라는 것이다. 이것이 라캉이 말하는 '실재계와의 행복한 만남'이다.

  지젝의 초기 글로서 대중의 인기를 얻었던 책은 라캉의 실재계 이론으로 영화를 분석한 『삐딱하게 보기Looking Awry(1991)와 미국의 대학원에서 가장 많이 읽힌『부정성에 머물기Tarrying with the Negative(1993), 그리고『증상을 즐겨라Enjoy Your Symotom!(1992)일 것이다.

  라캉은 르네상스 시대 한스 홀바인이 그린 <대사들>이라는 그림으로 숭고한 대상의 실체가 죽음(혹은 nothing)이라는 실재계를 설명했다. 이 그림을 보면 두 대사大使가 양옆에 서있고, 그 가운데 윗 쪽에 지구본을 비롯한 문명을 상징하는 책과 악기가 놓여있다. 그리고 아래쪽으로 길게 부푼 바케트 빵 모양의 무언가가 비스듬히 놓여 있다. 이것을 45도 정도 기울어진 각도에서 보면 해골의 모습이 보인다. 모든 숭고한 욕망의 대상은 잡으면 아무 것도 아니다. 살기 위해, 욕망을 지속하기 위해 우리는 무를 삐딱하게 환상 속에서 본다.

  '부정성the negative'은 삶은 죽음의 노예라고  말한 헤겔의 변증법에서 끌어낸 말이다. 삶 속에 들어온 죽음, 혹은 무는 부정성이다. 지젝은 포스트모더니즘이 주장하는 이념의 허구성을 비판했다. 그가 강조하는 것은 숭고한 이념, 혹은 법은 허구지만 그것이 없으면 삶은 지속되지 않는다는 필연이다. 정치적 리더로서의 '마스터' 역시 숭고한 이미지로서 외설적 아버지의 변신이다. 허구지만 절대적이고 해골이지만 삶의 모든 것이라면 이 두 가지의 대립하는 힘은 균형을 이루어야 안전하다. 어느 한 편으로 치우치면 본래 모습인 외설적 아버지가 나타나기 때문이다. 삶을 지속하는 길은 죽음이라는 부정성을 인정하고 삶의 길 위에 머무는 것이다. 어차피 시간이 흐르면 반전이 온다. 서두를 필요는 없다.

  지젝은 이것을 '증상을 즐겨라'라는 말로 표현하기도 한다. 증상이란 숭고한 대상, 혹은 욕망의 미끼다. 잡으면 허상이지만 나의 모든 것처럼 보여 얻으려 애쓰는 연인 혹은 삶의 목표가 증상이다. 증상을 서둘러 잡으려 애쓰지 말고 그냥 즐기라는 것이다. 프랭크 시나트라가 노래한 유명한 <마이 웨이My Way>의 원곡은 프랑스 샹송 <콤 다비튀드Comme d'habitude> 다. 마이 웨이는 개인의 자유와 독창성을 찬양하는데 그것은 관습과 보편성을 따르라는 프랑스 노래에 바탕을 둔다. 보편적 질서에 뿌리내리지 않으면 개인의 자유는 보장되지 않는다는 의미다. 둘 사이의 균형을 존중하는 것이 증상을 즐기는 길이다.

  자본주의에 희망은 있는가? 실재를 통찰하고 순환의 주기를 늦추는 것은 어려운가? 자유주의자들은 테러를 응징하기 위해 자신이 테러리스트가 되는 길을 피하기 어렵다. 교회가 성폭력을 숨기는 것은 성스러움을 간직하기 위해서다. 본능은 성스러운 질서를 지속하기 위한 동인이기 때문이다. 개인의 사생활을 감시하는 것을 폭로한 미국의 스노든은 왜 중요한가. 그것은 미국뿐 아니라 모든 강대국들이 똑같은 첩보활동을 한다는 것을 폭로한 것이기 때문이다. 어느 한 쪽으로 치우치지 않고 양면을 볼 줄 아는 지혜, 학교 교육이나 진화가 가르쳐온 것과 다른 방향의 계몽을 지젝은 수행하고 있다.

 

 

  부서지기 쉬운 절대성

  교육은 가르친다. 교회는 성스러운 곳이고 모든 악을 제거하여 순수함을 지켜야 한다고. 그러나 니체와 정신분석의 논리는 이와 반대다. 선이 악을 제거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악이 있기에 선이 존재한다는 것이다. 인간의 본능과 쾌락에의 유혹이 없다면 교회가 있을 이유가 없다. 성스러움은 본능의 이면이고 본능에 의해 태어난다. 지젝은 말한다. 자본시장에서 금융투기라는 더러운 폐수가 없다면 실물경제라는 건강한 아이를 가질 수 없다. 더러운 폐수가 건강한 아이의 혈통이다. 중요한 것은 악을 제거하려는 것이 아니라 타협을 통해 선으로 위장시키는 길이다. 예를 들면 부자의 세금을 늘리면 세금이 없는 곳으로 자금이 새어나간다. 그보다는 자선과 기부를 많이 하도록 유도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

  완벽한 절대성은 죽음이고 파국이다. 파국을 피하는 길은 타협이다. 프로이트가 말하듯이 인간의 본성은 공격적이고 이기적이다. 이 근원적 적대감은 제거되지 않는다. 제거하려 하면 오히려 더 커진다. 단결은 언제나 근원적 적대감으로 인해 분열을 끌어안고 있다. 예를 들어 툭하면 싸우는 형제도 이웃집 아이가 동생을 때리면 형은 동생과 연합하여 그 아이에게 대응한다. 물론 싸움에서 이긴 후, 형제는 다시 이익을 놓고 다툰다. 모든 단합된 정치적 저항이 일단 성공하면 내부에서 분열이 일어나 그 다음 행동으로 잘 나아가지 못하는 것과 같다.

  순수한 이념은 없다. 순수는 파국이다. 그러므로 문제해결을 모색할 때 차선책을 생각해야 한다. 자본주의와 민주주의가 살아남기 위해서는 절대성이 얼마나 부서지기 쉬운 '마스터'인지 알아야 한다. 모든 정치적 지도자도 마찬가지다. 권력은 순환한다. 질서를 위해 잠시 동안 '절대적인 척'할 뿐이다. 그런 척하는 것임을 모를 때 그 권력은 독재가 되고 파국으로 향한다. 이것이 부서지기 쉬운 절대성이다. 지젝이 분석하는 여러 가지 알 듯 모를 듯한 제안들은 이와 같은 정신분석의 맥락에서 읽으면 쉽게 파악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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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권택영權澤英/ 1947년 출생, 경희대 영어과 동대학원 영문과 졸업, 미국 네브라스카대학원에서 영문학 박사학위 취득, 문학평론가, 경희대 영어영문학과 명예교수, 미국 소설학회 회장, 한국아메리카학회 회장, 저서 『포스트모더니즘이란 무엇인가』『소설을 어떻게 볼 것인가』등, 국제 저널에 다수의 논문 게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