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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섯 번째 인류대멸종은 다가오는가/ 이정모(李庭模)

검지 정숙자 2017. 5. 9. 22:28

 

 

   『문학사상』2017-5월호/ 삶과 인문학

 

 

    여섯 번째 인류대멸종은 다가오는가

          

    이정모李庭模/ 서울시립과학관장

 

 

 

  칼 세이건, 지구를 대변하는 인류를 이야기하다

  딸에게 물려줄 인생의 구절을 고르라면, 나는 주저 없이 칼 세이건의 말을 고를 것이다. 칼 세이건의 말은 두 가지 버전이 있다. 하나는 책의 버전이고 다른 하나는 다큐멘터리의 버전이다. 먼저 책에서는 이렇게 말한다.

 

  우리는 종으로서의 인류를 사랑해야 하며, 지구에게 충성해야 한다. 아니면, 그 누가 우리의 지구를 대변해 줄 수 있겠는가? 우리의 생존은 우리 자신만이 이룩한 업적이 아니다. 그러므로 오늘을 사는 우리는 인류를 여기에 있게 한 코스모스에게 감사해야 할 것이다. (『코스모스』,682쪽)

 

  나는 글로 된 이 버전보다는 칼 세이건이 직접 말한 다음 버전을 더 좋아한다.

 

  우리는 종으로서의 인류를 사랑해야 하며, 지구에 충성을 바쳐야 합니다. 우리는 지구를 대변합니다. 생존하고 번성해야 하는 우리의 임무는 단지 우리 자신을 위한 것이 아니라 우리가 태어난, 아주 오래되고 광막한 코스모스 자체를 위한 것이기도 합니다.  (『코스모스』, 13화, 에필로그에서)

 

  강연 후 질의응답 시간이 되면 간혹 질문 대신 자신의 주장을 펴는 분들이 있다. 주로 공부를 많이 하시고 사회에 대한 책임의식이 높은 분들이다. 한마디로 '좋고' '착한' 분들이다. 그런 분들은 피폐해지는 지구 환경과 소멸해가는 지구 생명체에 대해 걱정을 많이 하신다. 또 "나는 인간이 없는 지구를 꿈꿉니다"라고 말씀하시곤 한다. 이해한다. 지구가 이 모양 이 꼴이 된 것은 바로 우리 현생 인류인 호모 사피엔스의 탓이 크기 때문이다. 그런데 지구와 자연이 아무리 중요해도 사람보다 귀하지는 않다. 지구에서 사람이 가장 귀하다. 이 우주가 우리 호모 사피엔스를 만난 것은 최고의 행운이다.

  호모 사피엔스가 등장하기 전까지 우주는 자기 나이가 138억 살인지 몰랐다. 호모 사피엔스가 등장하기 전에는 우주는 아름답거나 장엄한 적이 없다. 그리고 호모 사피엔스가 등장하기 전에는 그 어떤 꽃도 예쁘지 않았다. 꽃이 예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사람이 꽃에게 가서 고백해야 한다. "너는 참 예쁘구나"라고 말이다.

 

 

  행운, 인류의 존재 이유

  자연과 지구 그리고 우주보다 귀한 호모 사피엔스가 등장한 것은 그야말로 연속된 우연의 결과였다. 우선 우주의 등장 자체가 우연이자 행운이다. 우주는 138억 년 전 빅뱅의 결과로 탄생했다. 우주가 탄생한 후 거기에서 수소 원자가 생기고 이어서 별과 은하가 생기고, 별 안에서 헬륨을 비롯한 다양한 원소가 생겨나고, 또 별이 폭발하면서 생긴 무거운 원소들이 우주로 퍼져나갔다가 다시 뭉쳐서 지구라는 행성이 되었다. 이러한 과정은 그 자체만으로 너무나 큰 행운이다. 확률적으로 거의 있을 수 없는 일이다.

  행성까지는 그렇다고 치자. 38억 년 전 지구 바다의 한쪽 구석에서 기름 주머니가 생겼는데 그 안에 RNA 조각이 들어 있었다. 이것이 최초의 생명이다. 그 후 수없이 많은 우연을 통해서 5억 4,100만 년 전에 단단한 껍데기와 눈이 달린 생명체가 등장했다. 그러다가 2억 2,500만 년 전 무시무시한 공룡이 등장했다. 거의 샅은 시기에 포유류의 조상도 등장했다. 하지만 초기 포유류들은 몸집을 키우지 않았다. 괜히 큰 몸집으로 낮에 돌아다녀봐야 공룡의 밥이 되기 십상이었기 때문이다. 초기 포유류는 주먹만한 크기의 생쥐 같은 모습으로 밤에만 돌아다렸다. 6,600만 년 전 뜬금없이 지름 10킬로미터의 거대한 운석이 지구와 충돌했다. 지구에 대격변이 일어났다. 당시 고양이보다 커다란 육상동물은 모두 멸종했다. 덕분에 포유류의 시대가 도래했다. 야행성으로 땅속에 살던 포유류에게 지구 육상은 무주공산이었다. 포유류는 점차 덩치를 키워갔다.

  그러다가 700만 년 전 공통조상으로부터 침팬지와 인류, 두 종이 갈라섰다. 150만 년 전 호모 에렉투스는 우연히 불을 사용하는 법을 알게 되었다.(아직까지 인간을 제외한 그 어떤 동물도 불을 사용하지 못한다.) 물론 호모 에렉투스가 불을 직접 피울 수 있게 되기까지는 다시 100만 년의 시간이 필요했다. 불을 사용하게 된 인류는 드디어 아프리카를 벗어날 엄두를 낼 수 있었다. 그들은 아프리카 바깥에서 네안데르탈인, 데니소바인, 플로렌스인 등 다양한 인류로 진화하였다.

  한편 아프리카에 남아있던 호모 에렉투스 중에서 호모 사피엔스가 등장했다. 20만 년 전의 일이다. 그 가운데 일부가 10만 년 전 아프리카를 탈출했다. 그들은 아프리카 바깥에 있던 모든 다른 인류들을 멸절시켰다. 이것은 아주 우연한 결과였다. 호모 사피엔스는 다른 영장류와 달리 커다란 뇌를 가졌다. 하지만 네안데르탈인은 호모 사피엔스보다도 더 큰 뇌를 가지고 있었다. 네안데르탈인이 아니라 호모 사피엔스가 지구를 지배하게 된 것은 우연일까 필연일까?

  영국의 고생물학자 사이먼 콘웨이 모리스는 "진화의 시계를 되돌려도 비숫한 조건이라면 지금과 비숫한 결과를 낳았을 것"이라고 말한다. 지구에 호모 사피엔스가 등장한 것은 필연이라는 주장이다. 하지만 『풀하우스』의 저자인 스티븐 제이 굴드는 그렇지 않다고 한다. 같은 시점으로 돌아가 다시 진화가 시작된다면 진화는 전혀 다른 방향으로 진행되었을 것이라는 얘기다. 2억 2,500만 년 전 공룡과 포유류들이 등장했을 때 공룡이 우세했던 것은 우연이다. 만약에 포유류가 먼저 우세했다면 어땠을까? 굳이 6,600만 년 전이 아니라고 하더라도 커다란 운석은 지구와 충돌했을 것이다. 어쩌면 포유류들은 거의 멸종하고 공룡들이 지금 지구를 지배하게 되었을지도 모른다. 지금 우리 청력이 좋은 까닭은 공룡시대에 포유류들이 야행성으로 살았기 때문이다. 반대의 상황이었다면 현재의 파충류들이 소리를 잘 듣고 우리는 소리보다는 진동으로 상황을 파악하게 되었을 것이다. 우리에게는 라디오와 텔레비전도 없고, 음악과 휴대폰은 상상할 수도 없을 것이다. 멀리 빅뱅까지 갈 것도 없이 700만 년 전으로만 시간을 되돌려도 우리 호모 사피엔스가 등장할 확률은 극히 적다.

 

 

  진화, 가장 아름다운 단어

  기독교인이 가장 싫어하는 말이 '우연'이다. 그들은 우주 만물은 하나님이 창조했고 우주는 단 한 치의 오차도 없이 필연적으로 돌아간다고 주장한다. 따라서 기독교인에게 인류가 우연히 발생했다는 진화론은 옳지 않을 뿐만 아니라 공산주의보다 더 나쁜 주장이다. 그런데 나는 기독교인이다. 내 조상은 우리나라 초대 교인이다. 많은 사람들이 묻고 걱정한다. "신앙인이 과학을 하느라고 얼마나 양심의 가책을 받으세요?" 라고 말이다. 나는 양심의 가책을 받지 않는다. 왜냐하면 과학은 우리가 모르고 있는 게 얼마나 많은지, 또 우리가 알고 있는 것들도 조만간에 잘못된 것으로 드러날 가능성이 얼마든지 있을 수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고, 틀린 것으로 밝혀지면 그날부터 이전의 것은 모두 부인할 준비를 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게 과학이다.

 

  성경은 신의 말이요, 자연은 신의 작품이므로 신앙과 이성은 대립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대립하는 것처럼 보일 경우에는 자연에 대한 문제에서 과학은 신학보다 우월합니다. 왜냐하면 성경은 일반인의 이해를 위해 쓰여졌고 쉽게 재해석할 수 있지만, 자연은 변경할 수 없는 실재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만일 과학자들이 자연에 관한 진실을 증명했는데 그것이 성경에 있는 문장과 모순되는 듯이 보인다면, 그때는 신학자들이 그 문장의 의미를 재해석해서 명확히 해야 합니다.

 

  갈릴레오 갈릴레이가 자신을 후원하던 크리스티나 공주에게 위기에 빠진 자신을 구해달라고 쓴 편지 구절이다. 우주의 중심이 지구냐 태양이냐가 당시의 문제였다. 우리가 일상적으로 보는 천체의 움직임은 지구가 중심이든 태양이 중심이든 모두 쉽게 설명된다. 그런데 망원경으로 하늘을 관찰해보니 지구가 중심이어서는 설명할 수 없는 현상들이 보였다. 성경뿐만 아니라 모든 민족의 우주관에서는 지구가 중심이었다. 새로운 현상을 발견했다. 간단하다. 우리가 가지고 있던 설화를 바꾸면 된다. 

  하지만 지구가 합법적으로 태양 주변을 돌게 된 것은 1992년 10월 31일의 일이었다. 교황 요한 바오로 2세가 비로소 지동설을 인정하고 갈릴레오 갈릴레이의 후손들에게 사과 성명을 발표한 것이다. 1992년 이전에는 그 사실을 몰랐을까? 아니다. 괜한 권위주의에 빠져 자신의 오류를 인정하지 않았을 뿐이다. 천동설 자체는 죄가 없다. 단지 권위주의에 빠져 천동설을 고집했던 교회가 잘못했을 뿐이다. 진화도 마찬가지다. 괜한 권위주의가 합리적인 생각을 막고 있을 뿐이다. 지구중심설은 이미 깨졌다. 하지만 아주 짧은 시간에 모든 생명이 동시에 등장했다는 창조론은 여전히 한국과 미국에서만큼은 기승을 부리고 있다.

  권위주의는 과학에서도 문제가 된다. 과학의 권위주의는 환원주의다. 모든 걸 하나로 설명하려는 태도다. 진화론에서는 모든 것을 자연선택으로 설명하려고 한다. 눈 위에 눈썹이 있는 것도 그것이 생존에 유리했기 때문이다. 남자와 여자의 행동 패턴이 다른 것은 모두 진화심리학으로 설명하려고 한다. 딱히 이유가 없다고 해도 이는 얼마든지 있을 수 있는 일이다. 의심은 과학에서도 필요하다.

  삼엽충이 나오는 지층에서 고래 화석이 나온다든지, 공룡 뱃속에 인류가 들어있는 화석이 단 하나라도 나온다면 나는, 아니 모든 진화론자들은 그날로 지금까지 알고 받아들인 모든 진화론을 바로 버릴 준비가 되어 있다. 과학은 충성을 요구하지 않는다. 과학은 의심하는 것이고 의심을 견뎌내지 못하는 이론은 당장 폐기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지동설과 진화론만큼 아름다운 단어는 아직까지 없었다. 그 많은 의심과 핍박을 견디고 살아남은 단어다. 무수히 많은 관찰과 실험과 증거로 뒷받침되고 있다. 

 

 

  공생, 인류가 살아남는 방법

  나는 작년 4월까지 서대문자연사박물관 관장으로 일했다. 사람들은 자연사박물관이 뭐냐고 묻는다. 사람들의 질문에 나는 장난을 섞어서 "자연사박물관은 사고사나 돌연사 또는 병사가 아닐 자연사自然死한 생명들을 전시하는 곳"이라고 대답한다. 사람들이 수긍한다. 自然死自然史보다 더 익숙한 말이기 때문이다. 아래한글 워드 프로세서에서 ' 자연사'를 漢字로 변환시켜 보시라.  自然死自然史보다 먼저 나온다.

  나도 1992년 독일로 유학 가기 전까지는 자연사라는 말을 들어본 적이 없다. 유학 가서 1년쯤 지난 다음에야 자연사박물관에 처음 가봤다. 첫 만남에서 자연사에 대한 깊은 관심이 생겼다.

  우리는 역사를 왜 배우는가? 그저 옛날 얘기가 궁금해서가 아니다. 찬란했던 선조의 문화에 자부심을 느끼기 위해서도 아니다. 우리나라와 우리 민족이 어떻게 해서 여기까지 왔는지를 깨닫고 우리가 지속 가능한 방법은 무엇일지 고민하기 위해서다. 모든 나라는 망했다. 위대한 로마제국도 망했고 중국의 한나라도 망했다. 통일신라와 고려 그리고 조선도 수백 년을 이어왔지만 결국에는 망했다. 우리는 역사에서 망하는 과정을 배우는 것이다.

  자연사도 마찬가지다. 3억 년 동안이나 바다를 지배했던 삼엽충, 그리고 1억 5천만 년 동안이나 지구 육상을 지배했던 공룡들은 왜 멸종했을까? 이런 멸종에서 교훈을 얻는 것이다. 그 교훈으로 우리 인류가 얼마나 더 살 수 있을지 생각하고, 더 지속하기 위해서는 어떤 행동을 해야 하는지 고민하기 위해서 자연사를 공부하는 것이다.

  멸종은 나쁜 말이 아니다. 멸종이란 다음 세대의 생명들이 등장할 수 있도록 삶의 터전을 비워주는 것이다. 무수히 많은 멸종이 있었기에 인류도 등장할 수 있었다. 지금 지구는 여섯 번째 대멸종을 겪고 있다. 과학자들은 1950년대에 시작한 여섯 번째 대멸종은 짧으면 500년, 길어야 1만 년이면 완성될 것이라고 한다. 그런데 지난 다섯 차례의 대멸종에서 당시 최고 포식자는 반드시 죽고 멸종했다. 지금 최고 포식자는 바로 우리 인류다.

  인류라고 해서 영원히 존재할 수는 없을 것이다. 하지만 호모 사피엔스가 지구에 등장한 게 겨우 20만 년 전이다. 우리는 100만 년은 더 존재해야 정상이다. 그런데 우리 인류가 길어야 1만 년 안에 멸종하게 된다면 우리로서도 억울하지만 지구와 자연과 우주의 입장에서도 너무나 애통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우리는 조금 더 살아남아야 한다. 그 이유는 칼 세이건이 이미 이야기했다. 우리 자신만을 위해서가 아니라 코스모스를 위해서도 살아남아야 한다. 그 방법은 다른 생명들과 함께 생태계를 촘촘히 유지하는 것뿐이라고 자연사는 알려준다. 그것을 공생共生이라고 한다. 여기에는 연습이 필요하다. 그런데 우리는 달팽이, 지렁이, 풍뎅이를 보지 못하고 산다. 우리에게 보이는 생명이란 인간이 거의 전부다.

  가장 확실한 방법은 가까운 것에서 시작하는 것이다. 우리 주변에 있는 다른 사람들과 함께 살아가지 못하면서 눈에 보이지 않는 생명들과 함께 살겠다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진화와 역사가 말하는 것은 하나다. "같이 살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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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정모李庭模/ 1963년 출생, 연세대학교 생화학과 대학원 졸업, 독일 본대학교 화학과에서 연구. 안양대학교 교수 · 서대문자연사박물관장 역임, 현직 서울시립과학관장, 과학 분야 전문 작가, 저서 『달력과 권력』『그리스로마신화 사이언스』『공생 멸종 진화』『유전자에 특허를 내겠다고?』등, 역서『인간이력서』『매드사이언스북』『인간, 우리는 누구인가』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