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러 파트의 글

『계간 파란』2017 봄호 - 기원(발췌)

검지 정숙자 2017. 4. 18. 17:37

 

 

    계간 파란2017              기원

 

 

      issue  기원(발췌)

 

 

 

  장석원(시인) 불멸하는 전집 

  기원의 대상은 1980-90년대이다. 1970년대의 몇몇 지점들과 연결되기도 하는, 사라져 없어졌다고 여겨지는 문화의 아이콘들이다. 돌이킬 수 없는 역사가 있다. 그것은 박물관의 유물이 되었거나, 골동품 가게의 창고에 방치되어 있다. 사라진 헌책방의 서가에서 그것은 먼지의 이빨에 갉아 먹히고 있다. 늦기 전에 기억해야 한다. 과거라는 상실을 복구하려는 의도는 버려야 한다. 과거로 다시 돌아가지 않기 위해, 늦었을지도 모르는 지금에서야, 배움의 불을 켜 들고, 진정으로 잊어야 할 것이 무엇이고 무엇을 잊어서는 안 되는지에 대해 살펴보기 위해, 우리는 우리를 구성하고 있는 저 낱낱의 것들을 시간의 마당에 불러 모은다. (권두 에세이, p-2)

 

 

  이현승(시인) _ 최승자라는 기원 

  그러므로 흔히 천재들에게서 발견되는 엄청난 효율은 말 그대로 선택과 집중의 결과물이고, 더 넓은 차원에서 그 선택과 집중의 다른 말은 항상 '리스크'임에 틀림없다. 거의 곤충의 본능에 필적할 만큼의 효율성이란 그렇게 태어났다고 밖에는 말할 수 없는 품성과 자질로서 여러 겹의 자아를 요청하는 사회적인 삶의 양식과 조화를 이루기 쉽지 않다. 몇몇의 소수를 제외하고 예술적 천재성은 언제나 사회적 성공과는 양립하기 어려운 덕목인 까닭이다. 시계 수리공이 되어 돋보기를 끼고 앉아 대부분의 하루를 탕진하는 헤라클레스를 상상해 보라. 시간을 최대 비용으로 환산하려고 하는 자본주의 속에서 인간은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에 대해 끊임없이 '게으른' 자신을 미워한다. 해피엔딩의 드라마와는 달리 인간은 실패를 통해서만 자신의 욕망을 마주할 수 있으며, 자신이 무엇을 좋아하고 무엇을 할 수 있는지를 깨닫는 데에만 반생이 넘는 시간을 소모한다. 따라서 이미 예술의 아름다움에 매혹되고 정향된 이 예술가에게 가장 나쁜 상황은 바로 고효율도 리스크도 못 되는 비루함 그 자체이다. 인생에는 어떤 비극성조차도 광영됨으로 바꿔 놓는 아이러니가 숨겨져 있는 것이기에, 행복도 불행도 되지 못하는 삶을 견디는 것이야말로 비극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p.30-31)

 

  한용국(시인) _ 박노해

  고등학교를 졸업한 친구들은 서울의 공장으로 갔다. 한 달에 18만 원을 받는다고 했다. 나는 대학생이 되었다. 등록금은 93만 원이었다. 선배들은 『껍데기를 벗고서』(동녘신서43, 편집부 엮음, 1987), 『강좌철학』(윤영만, 世界, 1985) 같은 책을 읽어야 한다고 했다. 고민이 시작되었다. 친구들을 생각하면 나는 너무 한가했다. 어쩐지 죄의식이 들었다. …… 낮이면 회의나 데모를 하고 밤에는 사회과학 스터디를 했다. 그때 선배가 시집 한 권을 건넸다. 신동엽의 『누가 하늘을 보았다 하는가』였다. 그리고 『노동의 새벽』(박노해)을 읽었다. …… 강경대 열사의 죽음 이후 가열차게 일어났던 불길은 김지하의 한마디에 사그라들었다. …… 286 컴퓨터와 삼국지 게임이 있었고, 락카페가 있었고, 노래방이 있었다. 그 무렵 박노해 시인에게는 사형이 구형되었다. …… 낮에는 학교로 밤에는 학원으로 출근했다. 1990년대였다. 서태지가 등장했고, 대중문화가 불길처럼 일어나기 시작했다. 술을 마시면서 가끔씩 박노해 시인의 시를 읽었다. 「참된 시작」이었다. …… 대학 시절에는 운동권 아닌 친구들과 자주 토론하다가 싸우기도 했는데, 1990년대에는 이상하게도 모두가 운동권이었다고 했다. 노래방에 가서 마지막에는 꼭 모두 어깨동무를 하고 김광석의 「광야에서」를 불렀다. 투쟁! 투쟁! 아지를 하기도 했다. …… 박노해는 여전히 수감중이었다. …… 박노해 시인은 "그러니 그대 사라지지 말아라"라고 말했지만, 나는 이미 사라졌다. 박노해 시인은 평화운동가가 되었지만, 나는 자신의 평화를 위한 운동조차 못하고 있다. (p.33-37)

 

  이경수(문학평론가) _ 인류 역사를 성찰한 노동자 시인: 백무산 

  1989년 가을 어느 날의 카페가 문득 떠오른다. 학부 3학년 전공 수업 '문장론'을 같이 수강했던 선배와 동기와 함께 셋이서 세미나 비슷한 걸 했는데, 그때 처음 읽었던 시집이 1988년에 출간된 백무산의 첫 시집 『만국의 노동자여』였다. …… 그때 읽은 백무산의 시는 무척이나 강렬했다. 박노해의 『노동의 새벽』을 읽었을 때와는 또 다른 정서적 충격에 사로잡혔던 기억이 난다. …… 1988-89년의 현대중공업 파업을 배경으로 쓰인 그의 두 번째 시집『동트는 미포만의 새벽을 딛고』(1990)가 나왔을 때도 나는 망설임 없이 그의 두 번째 시집을 사서 읽었다. 백무산의 시는 한층 더 단단해져 있었고 두 번째 시집에 자주 등장했던 강철의 비유처럼 뚜벅뚜벅 노동자 시인의 길을 걸어가고 있었다. …… 그의 세 번째 시집 『인간의 시간』(1996)은 무척이나 혼란스러웠던 1990년대의 현실 속에서 꽤 인상 깊게 읽은 시집이었다. …… 1999년 《문화일보》신춘문예에 「인간이 담긴 풍경화」라는 백무산론으로 당선되어 등단했을 때 사실 주변에서는 의외라는 반응을 많이 보였었다. …… 백무산론으로 등단했고 이후에도 백무산의 시에 대해 가끔 글을 썼지만 시인을 직접 만날 기회는 없었다. 문단 모임에 잘 나가지 않은 탓도 있었고, 어딘가에 소속되어 글을 쓰는 것이 싫어서 문학 단체나 문단과 거리를 유지해 온 탓도 있었다. …… 2014년 4월 16일 이후 백무산의 시는 다시 시대 현실에 대한 비판적 목소리를 회복하고 있었다. 세월호 참사 직후에 나온 시집 『우리 모두가 세월호였다』에 수록된 「세월호 최후의 선장 박지영」과 2016년 촛불집회와 블랙리스트 파문에 맞서 최근에 출간된 시집 『천만 촛불 바다』에 수록된 「광장은 비어 있다」는 그런 점에서 눈여겨볼 만하다. …… 한 명이라도 더 살리려다 끝내 배 밖으로 나오지 못한 세월호 선원 박지영 씨야말로 진정한 의미에서 세월호 최후의 선장이었음을 천명하며 백무산은 "죽음을 뒤집는 4월의 명령을" 내린다. …… 섣불리 몸을 바꾸지도 않았고 그렇다고 변화에 둔감하지도 않았던 백무산의 치열함과 진중함이야말로 그의 시가 아직도 현재성을 잃지 않는 힘임을 새삼 깨닫는다. (p.39-44)

 

  나희덕(시인) _ 미학적 진원지로서의 기형도

  기형도는 갑작스럽고 때 이른 죽음(1960-1989)을 통해 강렬한 비극적 이미지를 부여받으며 한국 현대시의 중요한 기원 중 하나로 자리 잡았다. 기형도의 시와 삶을 일종의 '기원'으로 부를 수 있는 이유는 우선 그의 생애가 죽음이라는 사건으로 종결되었기 때문이며, 이와 동시에 그의 시가 끝내 완성될 수 없는 해석의 지평 속에서 새로운 의미들을 부여받았기 때문이다. …… 기형도 20주기 기념 문집 『정거장에서의 충고』를 읽어 보면, 2000년대 시인들의 습작기와 독서 체험에서 기형도라는 존재는 가장 앞자리에 돌올하게 자리 잡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1900년대 본격적으로 시를 읽고 쓰기 시작한 시인들을 '포스트-기형도 세대'라고 부를 수 있는 이유도 거기에 있다. 이전의 서정적 전통을 단절과 극복의 대상으로 여겼던 그 세대에게 기형도의 시는 새로은 시대적 징후와 감수성, 시적 발화법 등을 학습하기에 매우 매력적인 텍스트였을 것이다. …… 지금 생각해 보면, 1900년대는 자연을 매개로 한 전통 서정시에 대한 회의가 시작되고, 자본주의와 도시적 일상이 주된 시적 현실로 떠오르게 된 경계 지점이자 일종의 과도기였다. 이 시기에 시인들은 자연이 들려주는 위대한 잠언의 세계를 갈망하면서도 남루하고 우울한 도시의 거리를 배회할 수밖에 없었다. "시인은 더 이상 숲으로 가지 못한다"는 도정일의 전언처럼, 기형도는 스스로 자연의 비유를 경계하며 거리의 고통에 자신의 누추한 육체를 내맡겼다. "나는 이미 늙은 것이다"라는 마지막 문장은 마치 길 위에서 한 생을 마친 윤리적 대속자의 마지막 탄식처럼 들린다. 그런 점에서 기형도는 자신이 살지 않았던 1900년대의 징후들을 길지 않은 생애를 다해 예감하고 선취했던 시인이라고 할 수 있다. (p.47, 48, 56)

 

  김찬기(소설가) _ 아름다운 시와 더러운 산문

  장정일!

  그는 먼저 '아름다운 시'를 쓰는 시인이었지만, 『아담이 눈뜰 때』(1990) 이후로는 세상과의 불화를 더 직접적으로 노출한, 그의 말처럼 '더러운 산문'을 쓰는 소설가로 변신한다. 그런데 이 '더러운 산문' 쓰기의 작업은 '아름다운 시' 쓰기와는 다르게 늘 밥과 더 직접적으로 연결되는 것이기는 하지만, 특별히 『아담이 눈뜰 때』의 경우 다른 작가들의 작품보다 어 별난 밥 만들기의 소설적 기법과 소재들을 사용한 것 같지도 않다. 그러기에 『아담이 눈뜰 때』를 포스트모더니즘 논의와 관련하여 재평가하는 것(경박한 포스트모더니즘을 드러낸 것이란 평가를 포함해서)에 대해서는 일면 동의하기 어려운 측면이 분명 존재한다./ 다만, 분명한 것이 하나 있다. 『아담이 눈뜰 때』는 1990년대식 '내면 고백체', 더 좀 올려서 평가해 보면, 1990년대식 내면 고백체 소설의 한 기원을 연 소설로 평가 가능한 영역이 존재한다는 것이다. 잘 알려진 것처럼 우리 근대소설사에서 내면 고백체는 김동인과 염상섭을 거치면서 탄생한 것이겠지만, 그것은 당연히 세대를 거치면서 결을 달리한다. 이와 관련하여 1990년대의 내면 고백체 소설을 한번 떠올려 볼 때, 장정일의 『아담이 눈뜰 때』는 딱 맞는다.…… 『아담이 눈뜰 때』의 '나'는 대학 등록을 포기하고 등록금의 일부로 클로버 727 타자기를 산다. 『보트 하우스』는 그 『아담이 눈뜰 때』의 후일담 소설이다. 『아담이 눈뜰 때』의 '나'는 결국 작가가 되고, 2년 주기로 소설을 발표하는 유명 작가가 된다. …… 『보트 하우스』가 장정일의 키치론을 잘 구현한 작품이라고 할 때, 우선은 작품에서 드러나고 있는 '환'의 세계가 견인하고 있는 내용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 '나'는 예술원 회원직을 수락한 작가들을 결코 믿지 않는다. 그 이유는 좋은 작가란 "결코 어떤 권력이나 체제도 비호하지 않는다"는 믿음 때문이다. '나'는 작가를 "세상에 화평을 주러 온 것이 아니라 불화를 주러 온" 존재로 규정한다. 때문에 '나'에게 소설이란, "끊임없이 불화를 일으키는 형식"일 뿐이다. (p.58-59, 61, 62)

 

  장석원(시인) _ 헤비메탈 같은 진이정

  너 진이정 한번 읽어 봐. 누군데. 모르는구나. 네가 읽으면 좋겠어. 시에 도움이 될 거야. 내가 아는 이정은 공이정 선배인데, 이정이란 이름이 또 있구나. 그래 읽어 보도록 할게./ 이미 등단한, 외국문학을 전공하는 동기가 말했다. 아는 시인이 아니었다. 그가 추천했기 때문인지, 내가 방어막을 걷지 않아서였는지, 아니 내가 머리가 나빠서였겠지만, 시를 읽어도 잘 들어오지 않았다. 그런데 어떤 꿈틀거림. 시인이 요절했다는 사실이 나를 묘하게 흥분시켰다. …… 여전히 나는 진이정을 알지 못한다. 이해는 요원하다. 그를 만나고 싶다. 불가능하다. 그의 시를 사랑한다고 말한다. 그와 나, 그와 우리의 관계를 생각한다. 소개했던 그 외국어 문학 전공자는 진이정과 나의 언어를 두고, 파토스를 언급했다. 맞는 말이지만, 나는 치토스를 좋아했다. 내 시는 그가 말한 대로 파투 나기 일보 직전이었다. …… 시를 써서 돈을 벌 수 있다면 아니, 그가 쓴 시가 돈으로 교환되었더라면 그는 죽지 않았을 것이다라고 추측한들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우리는 지금 시를 파괴하는 진이정을 망치질을 보고 있다. 진이정의 검은 절규를 들으면서 각성한다. 시를 위해 순교한, 시의 칼에 목이 베인, 철철, 피를 흘리는 시인은 본다. 죽어 가는 자는 진이정이 아니다. 거짓으로 시를 만들어 내는 나를 내가 살해하기 위해, 시를 죽이지 않기 위해 진이정을 읽는다. …… 진이정은 홀연히 타올랐다가 꺼진 촛불이 아니다. 그가 없었다면 2000년대의 시가 없었을 것이다. 진이정이라는 변곡점 · 임계점이 있었다. 나는 진이정을 읽고, 진이정을 메모하고, 진이정을 흉내 냈는지도 모른다. (p.65, 66, 67, 71)

 

  정은경(문학평론가) _ 반계몽과 키치의 사도: 그림자를 판 사나이

  붉은 기운 가득한 종3과 싸구려 불온물로 가득 찬 청계천 어름의 세운상가란 나 같은 '범생'이에게는 깡패 소굴 같은 곳이었다. 1987년 민주화 항쟁 직후 1990년대 중반까지 대학생들이란 대체로 계몽적 이데올로기의 함성 속에 있었으므로, 1980년대 말에 등장한 유하의 저 데카당의 포즈는 사뭇 불온한 것이었다. 그러나 그랬기 때문에, 민주와 정의의 이념은 나무랄 데 없이 옳았고, 그 이념은 상취되었기 때문에 그 외침은 더 이상 청춘들의 '열망'이 될 수 없는 것이기도 했다. …… 오스카 와일드의 예술론에 따르자면, 예술이 자연을 모방하는 것이 아니라 자연이 예술을 모방한다. 유하는 '재현'을 중시하는 리얼리즘에 대한 모독일 수도  있는, 이 기이한 예술론의 가장 적극적인 지지자이자 실천가였다고 볼 수 있다. 불완전한 자연과 현실보다는, 차라리 매끈하게 조작된 환영을 택한 유하, 그는 그 복제와 환의 바다에서 시를 매개로 진정성과 의미를 일궈 내고 가꿔왔던 시인이다./ 우리는 더 이상 허풍이거나 사기라고 할 수 없는 가상현실의 일상 속에서 살고 있다. 우리는 매일 다니는 골목 담벼락보다 포털의 지도에 더 밝고, 친구의 표정보다 이모티콘의 표정에 더 민감하다. 포켓몬고의 캐릭터들이 거리의 빈틈을 메우고 있는 이 '증강된 현실'과 쓰나미와 같은 영상 더미 속에서 '나'와 '너'라는 실체와 소통은 어떻게 가능할 것인가. 유하의 시를 다시 읽어야 하는 지점이다. (p.76, 86-87)

 

  신형철(문학평론가) _ 무라카미 하루키, 혹은 부인된 매개자: 하나의 서론

  1975년 일본에서 일어난 빅뱅이 한국문학에서도 일어났다. 그러나 무라카미를 읽으며 새로운 문체를 익히고 소설을 쓰기 시작한 한국의 작가들과 또 그 작가들을 읽으면서 좋은 문장에 대한 감각을 익힌 어떤 독자들은 그의 영향을 잘 인정하지 않는다(그래서 다음처럼 솔직하게 인정하는 경우가 오히려 더 신선해 보인다. "내가 소설을 진지하게 생각하기 시작한 것은 중학교 때 무라카미 하루키의 소설을 접하면서부터였다. (중략) 내가 무라카미 하루키를 통해서 소설을 알게 되었다는 것은 소설을 쓰기 시작했을 때 나에게 들러붙어 있는 하루키적 세계관과 스타일을 지워 내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여야 했음을 의미한다." (김사과,「하루키와 나」『0 이하의 날들』창비, 2016. p.77. 이미 그 영향을 극복하고 자기 고유의 것을 찾은 사람만이 당당하게 인정할 수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왜일까. 무라카미를 통해 미국 소설의 어떤 스타일과 미학에 처음 눈을 뜨게 된 사람이 있다고 하자. 그가 어느 순간 그 미국 소설을 제대로 된 번역으로 직접 읽고 무라카미의 말을 이해하게 되었을 때, 그는 자신이 무라카미의 중개 없이 미국 소설과 직접 만났었더라도 충분히 좋았을 것이라고 믿으면서 그 중간에 끼어 있는 무라카미의 존재를 지우고 싶어 할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무라카미는 1990년대 이후 한국문학에서 '부인된 매개자'다, 이것은 마치 논문을 쓸 때 B라는 책의 어떤 구절을 A의 논문을 읽다가 발견했을 때 A로 부터의 재인용 사실을 밝히지 않고  곧바로 B를 각주로 다는 경우와 유사하다. 무라카미의 영향으로 습득한 '미국적으로 문학적인' 어떤 것은 우리에게는 '밝히고 싶지 않은 재인용'과도 같은 것이다. 그러므로 무라카미 때문에 비로소 『위대한 개츠비』를 읽었다고 말하는 것은 낯 뜨거운 일이고 무라카미가 좋아한다는 레이먼드 카버 정도는 얕잡아 보는 척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었을 것이다./ 이것도 다 십 수 년 전 이야기다. 무라카미가 부인된 매개자이자 감춰진 재인용으로 존재하는 어떤 세대에게 그는 불편한 존재였지만 이제는 그다음 세대가 또 무라카미를 읽고 있다. 그들은, 어떤 심리적 이유로 무라카미를 과잉 부정했던 앞 세대와는 달리, 그에게 거의 콤플렉스를 느끼지 않을 것이다. …… 오늘날 그가 신작을 낼 때마다 그의 문화적 본적지인 미국을 포함하여 전 세계에서 베스트셀러가 되는 것은 바로 이 이야기의 층위에서 무언가가 작동하기 때문이라고 해야 한다. 그렇다면 '무라카미적 내러티브'란 무엇인가. 정말 하고 싶고 또 해야 할 논의는 바로 이것인데, 지금 이 글을 서론 삼아 다음 기회에 시도할 수밖에 없겠다(그가 '문장을 쓰는 작가'가 아니라 '이야기를 구축하는 작가'가 된 것은 더 나아가 전 세계적 보편성을 갖는 '자기(self) 찾기 서사의 한 유형을 대표하는 작가가 된 데에는 그가 존경하는 융 학파 정신분석가 가와이 하야오의 영향이 꽤 컸던 것 같다. (무라카미 하루키 저, 고은진 역, 『하루키 하야오를 만나러 가다』, 문학사상, 2004 참조.) 무라카미의 내러티브가 융의 분석심리학의 내러티브와 갖는 구조적 상동성에 대해 논의해 보고 싶은데 기회가 곧 오기를 바라고 있다). (p.95-96, 97)

 

  송승환(시인, 문학평론가) _ 다른 삶과 다른 세계의 가능성: 시의 심연에서 만난 외국 시

  내가 구입한 최초의 무학서적은 두 권이다. 김현의 『한국문학의 위상』 (문학과지성사,1977/1987년 7쇄)이성복의 『뒹구는 돌은 언제 잠 깨는가』. 고등학교 2학년이던 내가 만난 두 권의 책은 우연이었지만 내 삶을 바꾼 배경이 되었다. 두 권의 책은 시인과 문학평론가의 꿈을 꾸고 글을 쓰는 삶의 기원이 되었다. …… 이성복의 시집은 어떤 느낌이 있었지만 그 느낌은 잘 말할 수 없었고 한동안 내게는 어려웠다. 반면에 김현의 평론집은 '나는 왜 문학을 하는가'라는 물음에 대한 하나의 답변을 제시해 주었다. 지금도 유의미한 "문학은 그 써먹지 못한다는 것을 써먹고 있다"는 김현의 문장은 당시의 나에게 문학을 삶으로 살아도 된다는 허락과 응원의 전언이었다. …… 그리하여 1990년 김현은, 나의 대학시절, 첫 문학 선생이 되었다. '시' 읽기와 쓰기는 강의실과 도서관이 아니라 1990년 작고한 김현의 평론집과 번역서를 통한 독서로 이뤄졌다. 말라르메와 발레리의 시는 김현의 평론집 『존재와 언어』를 통해 알게 되었다.그들의 시가 수록된 '민음사 세계시인선'을 모아서 읽기 시작하였다. …… 헌책방에서 어렵게 구한 프랑스 시선집 『반수신의 오후』(민희식· 이재호 편역, 범한서적. 1970) 는 프랑스와 비용부터 르네 샤르까지 아우르는 프랑스 근현대시의 단면들과 그들이 도달한 어떤 지점을 보여 주었다. …… 김현은 자신이 완전히 경도한 말라르메와 발레리를 경멸하면서 쥘 쉬페르비엘을 더 좋아한다고 말한 김수영을 통해 쥘 쉬페르비엘을 알게 되었다고 고백한다. 그는 김수영에 대한 오기와 쥘 쉐페르비엘에 대한 호기심이 뒤섞인 감정으로 그 시편들을 읽고 번역한다. …… 나는 마야코프스키와 알렉산드로 블로끄, 파울 첼란과 가르시아 로르까 등의 시에 스며 있는 역사성과 미학을 되새기면서 김수영과 김춘수, 김종삼과 김구용의 시를 겹쳐 읽는다. 시는 외국 시와 한국시로 구분되는 것이 아니라 시의 심연에서 언어의 경계 너머로 모여들면서 교차하고 있기 때문이다. (p.100,101,102,104,105) 

 

  전형철(시인) _ 찢어, 버려, 태워

  나는 특수반이었다. 생각하는 그 특수반이 맞다. 사실 그것은 생존을 위한 나의 선택이었다. 적어도 내가 고등학교를 다닌 1990년대 중반에는 한 분야에 특별한 재능이나 성과가 있는 학생은 '구타 유발자'아 '왕따'에서 빗겨 갈 수 있었다. 전교에서 가장 키가 작았던 내게 공부는 1990년대 사회의 축소판인 학교를 살아 내는 몇 안 되는 생존의 선택지였다. 그런데 여기엔 양면이 있었다. 특수반에게는 공부 외에는 그 어느 것도 허락되지 않았다는 점이다. 수업에 들어오지 않는 체육 특기자처럼, 양계장에서 알만 낳는 산란계처럼 나는 공부만 해야 하는 특기자였고 그것이 가문과 학교가 부여한 거부할 수 없는 의무였다. 당연히 미술, 음악수업 등과 같은 시간은 특수반에게는 자습 시간에 지나지 않았다. …… 대학 국문과에 입학했다. 정신없이 달려온 내게 대학은 시험에 자주 나오는 선상지扇狀地 같았다. 1990년대 말 학과에는 아직 학회 문화가 많이 남아 있었다. 일종의 동호회 성격을 지녔지만 학교가 아니라 학과 내에 존재한다는 점에서 끈끈함과 유대감은 남달랐다. 나는 '문예창작반'이라는 이름의 시와 소설 창작을 주로 한다는 학회에 누구의 허락이나 반대 없이 내 발로 찾아갔다. 첫 공개 합평회…… 2학년 선배의 시가 제출되고 그 위 선배들이 시에 대해 한마디 한마디 할 때마다 신입생들의 분위기는 술렁임에서 절망으로 그리고 분노로 이어졌다. …… 결국 각 학회의 공개 모임이 끝난 후 '문창반'에 남은 공식 신입생은 3명에 불과했다. …… 20-30 줄의 시는 합평회가 끝나고 나면 하이쿠가 돼 버리거나 아예 쓰레기통에 버려야 할 폐지에 불과한 것이 되어 버렸다. 그 일이 있은 후 우리 사이에는 이런 자조적이고 해학적인 말이 생겨났다. 시의 단계는 세 단계, '찢어, 버려, 태워!'의 경지가 있다고. 합평회는 그렇게 살벌했다. 피그말리온 효과(Pygmalion Effect)보다는 스티그마 효과(Stigma Effect)를 신봉하고 그것을 끝내 돌파해 내는 데 서로 간의 암묵적 인 합의가 있었던 것 같다. 아마도 그 중심의 프로파간다는 '견딤'이었던 듯싶다. 합평회는 냉혹했지만 뒤풀이는 따듯했다. '그 구절 좋더라'라는 말이 아주 가끔이지만 오가기도 하고, …… 지금도 나는 합평회를 한다. 시를 내지는 않지만 학생들의 시를 평해 주는 일을 한 달에 한 번 하고 있다. 가끔은 나도 그때처럼 누군가에게 내 시가 처절히 까일지라도(?) 이 막힘이 풀렸으면 할 때가 있다. 물론 아주 가까운 시인들에게 보내 조언을 듣기도 하지만 옛날 같은 방식은 아니고 결과를 기대하는 것도 아니다. (p.107,108,110-111,112)

 

  백승권(글쓰기 연구소 대표)금서의 추억

  시골에서 갓 올라와 시인이라곤 서정주, 윤동주, 릴케, 하이네가 전부인 줄 알던 나는 일대 혼란에 사로잡히지 않을 수 없었다. 김수영은 내가 알았던, 내가 믿었던 시와는 너무 다른 세계였다. 친구는 어리둥절해 있는 우리에게 또 다른 생경한 이름 하나를 던졌다. 김지하, 그는 지금 감옥에 갇혀 있으며(실제로는 형 집행 정지 상태로 준 연금 상태였음) 그의 시를 읽는 행위는 범법 행위가 된다고 했다. 그의 시집은 판매 금지됐으며 심지어 『창작과 비평』영인본에조차 그의 시가 실린 지면이 모두 백지 상태로 인쇄됐다고 했다. 친구는 아직 김지하의 시를 읽지 못했지만, 대학에 다니는 선배를 통해 그의 전설 같은 일화와 그의 시가 가진 위대성이 앞으로 우리 문학을 뒤흔들어 놓을 거란 얘길 들었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 새 책이 나오는 족족 베스트 셀러가 될 만큼 대중적 관심도 뜨거웠다. 그럴수록 그에 대한 경외감과 호기심도 사라져 갔다. 김지하는 이제 특별한 관심을 갖지 않아도 어디서나 만날 수 있게 됐기 때문이었다. …… "가방에 빨리 집어넣어라. 집에서만 보고 갖고 다니지 마라." 난 그날 밤 자취방에 돌아와 엉겁결에 받은 그 책을 읽기 시작했다. 『농부의 밤』이란 제목을 단 김남주 시인의 시집이었다. 난 이날 처음 김남주라는 이름을 알게 됐다. 조악한 편집과 인쇄로 만들어진 이 시집의 뒷부분엔 김남주 시인이 아직 옥중에 있고 이 시집은 옥중에서 쓴 시를 면회자가 묶은 것이란 설명이 붙어 있었다. 금서였다. …… 1992년 우리나라에선 김영삼 씨가 대통령이 되고, 동유럽을 중심으로 사회주의 공산주의 정권들이 도미노처럼 몰락의 대열에 합류했다. 난 노동운동을 정리했다. 이듬해 겨우 직장을 얻어 월급을 받는 직장인이 됐다. 그 이후 내 책장 후미진 구석에 꽂힌 금서 위엔 먼지가 쌓이기 시작했다. …… 이로써 금서의 시대는 끝났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20년이 더 흐른 지금 갑자기 '폴란드 망명정부의 지폐'가 되살아나는 일이 생겨 버렸다. 그들은 지금 망명정부의 지폐를 되살리려다 스스로 망명정부가 될 운명을 맡고 말았다. (p.115,116,117-118,119)

 

  황정산(문학평론가, 시인) _ 마르크스를 다시 떠올리다

  얼마 전 이삿짐을 정리하면서 오래된 종이 박스를 열었다. 몇 번의 이사에도 풀어 보지 못한 박스들 중 하나이다. 낡아서 딱딱해지거나 더 부드러워진 책과 복사물들이 나왔다. 조잡한 표지의 리프린트판의 책들과 또 그 책들을 다시 복사한 것들이다. 버리지 못하고 큰 보물처럼 몇 번의 이사에도 가지고 다니고 있다. …… 더러 푸코를 인용하고 들뢰즈의 말을 빌리지만 세상을 보는 관점과 그것을 표현하는 방식에는 아직 마르크스와 루카치를 벗어나고 있지 못함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다. 그래서 바로 그런 이유로 이 모든 책들을 몇 번의 이사에도 소중한 보물처럼 아직도 가지고 있는 것 같다. …… 대학가서점이 사라지고 있다는 기사를 여러 번 접한 적이 있다. 책의 유통이 인터넷과 대형 서점 중심으로 이루어지고 또한 대부분의 정보가 책보다는 인터넷을 통해 전달되는 현실에서 일어나는 당연한 현상일 것이다. 여기에 더해 눈앞의 취직 공부에 매달려애 하는 작금의 대학생들의 현실이 책과 서점을 멀리하게 만들었을 것이라는 점은 쉽게 생각할 수 있다. 하지만 한때는 서점이 모든 문화의 중심이던 때가 있었다. 바로 위에서 서술한 내 경험이 있었던 1980년대이다. 서점의 이름을 안다는 것이 지성의 징표가 되고 그 서점에서 산 한 권의 책이 인생을 송두리째 바꾸는 바로 그런 시대였다. …… 이래저래 정치 현실도 1980년대로 돌아가고 있는 지금은 다시 1980년대 사회과학 서점의 번영이 그리워지는 시절이다. (p.121,122,123-124,125)

 

  고명철 (문학평론가) _ 대학가 인문사회과학 서점: 시장주의를 넘어선 문화 운동  

  그렇다. 내게 낯익은 이 풍경은 명륜동 3가의 대학가에 자리한 인문사회과학 서점 '풀무질' '논장'을 괄호 안에 넣고서는 말할 수 없다. 말 그대로 이들 서점은 책을 파는 역할에만 국한된 게 아니라 대학 문화를 주체적으로 구성하는 매우 소중한 지적 인프라로서 손색이 없다. 때문에 이들 서점의 존재 가치를 생각하지 않는 나의 지난 시절 대학 문화는 어딘가 텅 비어 있는 공허감으로 다가온다. 그런데 최근 대학 문화를 살펴볼 때, 대단히 안타까운 현실은 이러한 존재 가치를 지녔던 인문사회과학 서점이 버티기 어려울 정도의 경영난 때문에 하나둘 없어져 갔고, 몇 개만 간신히 그 명맥을 유지하고 있다는 소문이 들려온다. …… 앞서 대학가 인문사회과학 서점이 퇴조하는 현상적 이유를 최첨단 과학기술 미디어의 발달에서 찾아볼 수 있다면, 몇 가지 다른 사안을 검토해 볼 수 있다. 인문사회과학 서점이 지난 시기 대학 문화를 구성하는 지적 인프라로서 몫을 수행했던 데에는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는 대학 문화의 주체(대학생과 대학원생을 포괄한 다양한 대학 구성원)의 적극적 문화 수행 능력이 중요한 몫을 담당하였다. ……  지금은 딱히 대학으로 국한시키지 않더라도 다양한 문화 주체들이 온오프라인에서 다양한 활동을 하고 있지만 1990년대 후반만 하더라도 사회에서 문화 소모임 활동이 그리 활발한 편이 아니었음을 고려해 보면, '논장'의 기획과 실천은 신선하였다. 무엇보다 대학가 인문사회과학 서점의 당면 과제와 전망을 적극 실천하였다는 점에서 진취적이었다. 때문에 '논장'을 들고나는 사람들은 대학 구성원으로부터 점차 지역사회 구성원으로 확산되면서 대학 문화의 인프라가 한층 넓어졌다.…… 좀더 근본적인 문제로, 종이책에 대한 구매욕이 현저히 소멸되고 위축된 대학가에서 서점이란 공간 자체가 들어설 여지가 없는데 이러한 문화 운동의 현실성을 어떻게 실현할 수 있을까. 여기서, 우리에게 절실히 필요한 것은 이러한 문화 운동의 현실성을 보증해 내는 상상력일 터이다. 그것은 시장주의를 넘어선 문화 가치를 창출하는, 즉 이러한 대학가의 문화 운동이 대학 구성원에게만 국한된 게 아니라 지역사회의 문화 가치와 소통하는 대학, 결국 대학의 전문성이 지역사회의 현실성과 적극 소통함으로써 지금보다 높은 차원의 문화 가치를 향유하는 문화 인프라로서 대학가의 인문사회과학 서점을 갱신시켜야 할 것이다. (p.128,129-130,131-132,132-133)

 

  임지연 (문학평론가) _ 건국대 10.28에 대한 기억: 사흘 밤 사흘 낮, 패배와 침묵 속에 머물기

  필름이 끊겼다는 말이 있다. 대체로 기억이 일시적으로 재생되지 않을 때 하는 말이다. 1980년대 후반 대학을 다녔던 내게 필름이 끊겼던 때가 두 번 있었다. 물론 술자리에서 일어난 일은 아니다. 특정 시간이 통째로 사라졌다. 첫 번째 경우는 1989년 겨울, 동부경찰서에 연행되었다가 기소유예로 풀려나기까지 약 2박 3일 간의 시간이다. 최근 조금씩 복원되는 중이다. 나를 연행한 젊은 형사가 성균관대 출신이고, 그해 겨울이 가기 전 사과의 편지였는지 카드였는지를 보내온 기억이 있지만, 그것은 동부서 철창 안에서 일어난 일이 아니다. 사진 없는 사진틀로만 기억이 존재할 수 있을까? 그 2박 3일 간의 기억이 사라지고 말았다. …… 1986년 10월 28일, 건국대학교 사회과학관 앞, 문과대 앞, 학생회관 앞 광장은 어수선했다. 가을이라 쌀쌀했다. 일찌감치 학교에 들어온 외부 대학 집회 참가자들로 광장은 북적였다. 대규모 연합 집회가 건국대에서 열린다고 했다. 외부 대학 학생들은 심지어 "건국대생은 동참하라"는 구호를 외치기도 했다. 정문 앞에서 전두환과 레이건의 화형식이 있었다. …… 지연이는 집이 머니까 빨리 나가라, 여긴 너무 위험하니까 집에 갔다가 내일 다시 오는 게 좋겠다고 했다. 사회과학관 옆으로 낮은 담장을 끼고 하숙을 치는 주택가가 있었다. 전경들은 물샐틈없이 막는다고 했지만, 개구멍은 어디에나 꼭 있는 법. 남자애들은 내가 얼마나 욕을 잘하고, 힘이 세며, 자율적이고, 이성적이며, 정치적인지를 잘 모른다고 생각하며 그 친절에 응했다. 그때 나는 숙부 댁에서 지내고 있었는데, 눈치가 보이는 건 어쩔 수 없었다. 그래, 집에 갔다가 내일 일찍 오자. 내일 보자. 손을 흔들고 전철을 탔다. 그날 밤 뉴스를 보고 경악했다. 학교엔 갈 수 없었다. 휴교령이 떨어졌다. …… 나는 건국대 10.28 애학투련 사건을 철저한 패배로 평가했다. 전략과 전술 모두, 적에게 패했다. '전국반외세반독재 애국학생투쟁연합(애학투련)' 은 결성한 날 사라져 버린 기묘한 대중적 투쟁 조직이었다. 그 패배를 인정하는 대신 일제히 침묵했다. 1980년대 단일 사건으로 18,900명의 경찰이 동원되어 1,525명이 연행되고, 1,265명이 구속된 사건은 아마 없었을 것이다. 그토록 폭력적인 진압도 없었을 것이다. 나의 기억은 왜 사라진 걸까? 그들과 끝까지 함께 있지 못했다는 죄책감 때문이었을 것이다. 나는 오히려 더 명랑해졌다. 더 많이 욕을 하고, 사나워졌고, 여성성을 버리려고 했다. 미안하다고 사과하지 못했다. 대신 더 센 욕을 개발했다. 그리고 1987년 봄이 왔고, 박종철이 탁 치니 억 하고 죽었으며, 이한열이 쓰러졌고, 뜨거운 6월을 맞이했다. …… 이후 전투적 학생회론이 부상하면서 활동가들은 대중 조직으로 속속 들어갔고, 1987년 '전대협'이 탄생했다. 애학투련이라는 건대 항쟁을 통해 학생 활동가들이 구속 수배되고, 정권의 탄압으로 심하게 위축되었던 학생운동은 '대중화'의 물결을 타고 1987년 6월 항쟁의 거대한 바다로 나아가게 되었다. 패배와 침묵의 시간 뒤에 온 새로운 시대였다. 몇 개월 간의 잃어버린 시간들은 침묵의 시간 속으로 가라앉았다. 굳이 기억을 찾아 딱 맞는 퍼즐로 맞추지 않으려고 한다. 침묵의 반짝임으로 그 사건은 내 안에 있기 때문이다. (p.135,137,138, 139,140)

 

  정의진(파리8대학에서 문학박사 학위 취득) _ 강경대 

  서울대 언어학과 학생회장이던 박종철은, 서울대 '민주화추진위원회' 사건으로 수배 중이던 선배 박종운의 은신처를 대라며 경찰이 남영동 대공분실에서 불법적으로 자행한 고문에 의해 1987년 1월 숨졌다. …… 연세대 경영학과 2학년이던 이한열은, 6.10 항쟁 전날인 1987년 6월 9일의 출정식에서 전투경찰이 시위대를 직접 겨냥하여 발사한 최루탄에 맞아 사망하였다. 이한열의 사망은 광주 학살의 원죄를 안고 출발한 5공 군부 정권과 대한민국 시민 사이의 직접 대결을 돌이킬 수 없는 것으로 만들었다. …… 1991년 4월 26일의 명지대 경영학과 1학년 강경대 타살 사망 사건은 박종철, 이한열의 죽음과는 또 다른 의미를 내포하고 있었다. …… 강경대 사망 3일 후인 4월 29일 전남대 박승희가 강경대의 죽음이 의미 없이 망각되지 않기를 호소하며 분신하였다. 이를 계기로 6.10 항쟁 이후 가장 큰 규모의 전국적인 시위가 전개되었다. 5월 1일 안동대 김영균, 5월 3일 경원대 천세용, 5월 8일 전국민족민주운동연합 사회부장 김기설, 5월 10일 노동자 윤용하, 5월 18일 전남 보성고 김철수와 노동자 이경순, 5월 22일 노동자 정상순…. 신문을 펼치고 뉴스를 틀기가 무서웠다. 그리고 5월 25일 성균관대 김귀정이 또다시 전경과 백골단의 무자비한 시위 진압으로 질식사하였다./ 이러한 일련의 과정 한가운데서 5월 6일 발생한 대한조선공사(한진중공업의 전신) 노조위원장 박창수의 의문의 죽음은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 나아가 박정희 시절의 중앙정보부와 5공 이래의 안기부에서 발생한 과거의 모든 의문사들을 다시 떠올리게 만들었다. 대우조선 파업투쟁지원회의 참석을 이유로 1991년 2월에 구속 수감된 후, 박창수는 안기부로 이관되어 취조를 받았다. 안기부의 고문에 의한 것으로 추정되는 이마의 상처 때문에 5월 4일 안양병원에 입원한 박창수는, 이틀 후 병원 뒷마당에서 변사체로 발견되었다. 사건 발생 직전까지 박창수는 감옥에서 강경대의 타살에 항의하는 단식투쟁을 진행하고 있었다. 안기부는 박창수가 수감 생활을 비관하여 병원 옥상에서 뛰어내려 자살하였다고 발표하였으나, 추락사로 인한 외상은 그의 몸에서 발견되지 않았다. …… 백남기 농민의 부검 문제가 큰 사회적 쟁점으로 부각된 후 그의 시신을 지키기 위하여 2016년 후반기 내내 서울대 병원 영안실에 모인 시민들 중 상당수는, 1991년 5월의 이러한 상황을 기억하는 이들이었다. ……필자는 1991년 5월 투쟁 기간에 소집 해제를 2개월 남긴 지방 소도시의 방위병이었다. 방위도 군인인지라, 5월 초중순의 어느 주말 가슴 졸이며 근무지를 이탈하여, 먼발치에서 서울의 시위 현장을 지켜만 보았다. …… 박종철, 이한열, 강경대, 이 이름들이 의미하는 바가, 그때의 많은 학생들의 투쟁이 마찬가지로 의미했듯이, 이런저런 이념보다 근본적인 것, 즉 인간의 기본적인 존엄성과 이를 보장하는 진정한 민주주의이기 때문이다. 박종철, 이한열, 강경대, 이 이름들은 민주주의라는 끝나지 않을 과제를 지탱하는 이름들이다. (p.142-143, 144-145, 146, 146-147, 149-150)

 

  박성호(현재 고려대학교 CORE사업단 연구교수) _ 횃불에서 촛불로

  역사는 거대한 나선이다. 이것은 지나간 11월의 기억이면서도, 또한 그때의 기억이 아니기도 하다. 2016년 11월 광장을 촛불이 가득 메웠던 것처럼, 118년 전인 1898년 11월에도 사람들은 광장에 모여들었다. …… 그렇다면 1898년 11월에는? 이때에도 죽음이 있었다. 어찌 보면 열사의 원형 또한 이때에 탄생했다. 만민공동회를 저지하기 위해 수구 관료들이 동원했던 황국협회와의 충돌 과정에서 사망했던 가난한 신기료 장수가 바로 그 주인공이었다./ 원래 그는 이름이 밝혀지지 않아 당시 시민들이 무명의사(無名義士)라는 푯말을 달아주었었다. 그러나 남편이 만민공동회의에 나가서 며칠째 돌아오지 않는 것을 이상하게 여긴 부인이 나타나면서 뒤늦게 이름이 알려졌다. 마포에 살던 이 신기료 장수의 이름은 '김덕구', 그의 죽음은 대한제국을 향한 만민공동회의 충의(忠義)를 나타내는 표상이 되었다. 말하자면 '열사'의 탄생이었던 셈이다./ 열사의 고귀한 희생 덕분이었는지는 몰라도 며칠 후 고종은 만민공동회의 요구를 전격적으로 받아들이겠노라 선포했다. 만민들은 환호했다. 그리고 의롭게 죽어 간 김덕구를 위해 성대한 노제(路祭)를 지냈다. 종로에서 출발하여 묘역인 갈월동에 이르는 이 긴 행렬에는 당시 수만 명의 인파가 운집했노라고 당시 신문들은 전하고 있다. …… 이러한 광장의 변모가 시작된 기점은 아마도 2002년일 것이다. 2002년 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은 역시 월드컵이다. 1987년으로부터 꼭 15년이 지난 6월, 사람들은 또다시 광장으로 모여들었다. 하지만 이곳에는 죽음과 횃불이 없었고, 대신 함성과 깃발이 있었다. 구호는 응원으로 바뀌었고, 집회는 축제로 대체되었다. 시청 앞 광장을 가득 메운 사람들의 모습이 15년 전 그때의 사진과 나란히 전시되기도 했다. 똑같은 장소에서 똑같이 인파가 몰려들었지만, 21세기의 첫머리에서부터 광장은 커다란 변화를 예고하고 있었다./ 한국의 16강 행을 결정지은 대 포르투갈 경기 하루 전, 미군 장갑차가 두 명의 여중생을 압사시킨 사고가 터졌다. 그러나 사건을 일으킨 미군에 대한 재판 과정에서 미국 측의 무성의한 태도가 비판 여론을 불러일으켰고, 급기야 뒤늦게 사건의 전모가 사람들에게 알려지면서 사람들은 다시 광장으로 모여들었다./ 공교롭게도 이 시기 역시 11월이었다. …… 2002년 11월의 효순-미선 추모 집회를 기점으로 광장의 양상은 크게 달라졌다는 사실이다. 한일 월드컵이 그 계기였다면, 효순-미선 추모 집회는 그 결과물이었다. 광장에 촛불이 처음으로 등장했다는 점은 이러한 변화에 대한 상징이라고 해도 좋을 것이다./ 이후로 촛불은 한국의 광장을 뒤덮는 가장 핵심적인 기호가 되었다. 2004년 봄의 노무현 대통령 탄핵 반대 집회에서도 거리를 메운 것은 촛불이었다. 2008년의 미국산 쇠고기 수입 반대 집회도 그러했다. …… 1898년의 광장은 미완으로 끝났다. 만민공동회의 뜻을 전부 받아들일 것처럼 보였던 고종은 12월에 태도를 뒤집어서 모든 정치적인 집회를 금지하라는 영을 내린다. 1987년의 광장은 어떠했던가. 6.29 선언 뒤에 등장한 것은 군부 세력의 연장선상에 놓인 노태우 정권이었다. 지금 다시금 달라진 광장 위에서 '촛불'은 무엇을 비추고자 하는가? 광장의 출발점을 다시금 돌아봐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지 않을까. (p.152-153, 153-154, 154-155, 156, 1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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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하 목록

 

 159 김종훈(문학평론가) _ 전교조 한 교실 두 담임 

 167 이주라(현재 한림대학교 한림과학원 HK연구교수) _ 야학 야학

 174 한용국(시인) _ 폐광 폐광

 180 한래희(현재 숭실대학교 베어드학부대학 교수) _ 프로야구 최동원 그리고 우승의 추억

 189 허진석(시인)88올림픽 1988년 올림픽

 197 이종길(현재 아시아 경제 기자) _ 애마부인 그녀가 기다리던 음습한 도피처

 203 서동균(시인) _ 선데이 서울 금지된 소통, 그 기억 속으로

 210 강성률(현재 광운대학교 교수) _ 람보와 터미네이터 하드 바디의 재현, 그 시대의 표현

 218 채상우(시인) _ 홍콩 느와르 따거들의 엘레지: 열혈남아*

 238 박정대(시인) _ 장만옥 누군가는 끝없이 밤을 안고 태어난다*: 영원히 잊지 못할 1분의 추억, 장만옥, 아비정전 

 256 조강석(문학평론가) _ 동사서독 상처의 스테인드글라스

 263 박소란(시인) 왕가위 춘광사설(春光乍洩) 

 270 기혁(시인) _ 비트 '지금, 여기'에서 「비트」를 감각한다는 것

 283 노춘기(시인) _ 재패니메이션 보노보노를 아시나요?

 291 백지은(문학평론가) _ 질투 추억이 미래를 향해야 할 때

 299 박상수(시인, 문학평론가 ) _ X세대 X세대란 게 있었다구요?

 308 노춘기(시인) _ 편의점 맥주를 사러 가게로

 316 이근화(시인) _ 롯데월드 호수에 빠진 환상

 324 이현승(시인) _ 노래방 & 비디오방 우리들의 개인적인 방: 노래방과 비디오방

 333 전형철(시인) _ 자취방 이탈된 혜성

 340 장철환(문학평론가) _ WHP HWP

 348 송승환(시인, 문학평론가) _ PC통신 온라인 접속과 디지털 글쓰기의 도래: 1990년대 문화와 PC 통신

 356 이근화(시인) _ 여행 자율화 타율적 삶

 364 정우신(시인) _ 마이마이 오토리버스

 372 안남일(현재 고려대학교 문화스포츠대학 문화창의학부 교수) _ 노찾사 광장에서 다시 듣고 부르는 '노래를 찾는 사람들

 379 정의진(파리8대학에서 문학박사 학위 취득) _ 노찾사 노래를 찾는 사람들

 388 이경수(문학평론가) _ 김광석 서른 즈음에 떠나 버린 청년 가객을 기리며: 김광석

 395 김종훈(문학평론가) _ 김현식 내 사랑 내 곁에

 402 김참(시인) _ 빽판 아날로그의 시대

 411 박장호(시인) _ X-Japan 사이키델릭 바이올런스 & 크라임 오브 비주얼 쇼크

 423 신동옥(시인) _ Grunge Rock 역사에서 잘려 나간 내면의 함성: 그런지 록(Grunge Rock)

 437 박민규(시인) _ Pink Floyd 핑크 플로이드: 프로그레시브한 동물 우화와 벽 너머의 상상: X세대의 정치화와 그 기원

 444 최원(시인) _ Metallica  메탈리카(METALLICA): 어릿광대들의 복종 놀이

 452 장석원(시인) _ 서태지와 아이들 모든 것이 무너지고 있었는데 서태지가 나타났다: 오렌지, 오려 낸 지 오래되었지만, 아직 먹지 못한, 어륀지

 460 김승일(시인) _ S.E.S. & H.O.T. 1997년, 우리를 열광하게 했던: S.E.S. & H.O.T. 를 다시 꺼내 들으며

 472 김건영(시인) _ 전자오락실 나의 만신전(萬神殿), 오락실

 484 주영중(시인) _ 기원 손과 몸의 대화 장소로서의 기원(棋院)

 495 윤성학(시인) _ 성수대교 & 삼풍백화점 행복하자 좀, 아프지 말고

 503 임지연( 문학평론가) _ IMF I m f, 나와 네 인생의 이야기

 510 채상우(시인) _ 그러자 나는 자신이 미워졌다*

  - 필자 44명, 총 56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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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계간 파란』2017-봄호 <issue       기원>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