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세이 한 편

이태동_해외수필 읽기(해설)/ 들길 : 하이데거

검지 정숙자 2017. 4. 24. 21:47

 

 

   <해외수필 읽기14 - 해설 / 들길 : 하이데거 >

 

 

    사물의 실존 탐구를 위한 사색

 

    이태동

 

 

  마르틴 하이데거는 자크 데리다가 출현하기 전까지 실존주의 철학자로서 서구 사상계에서 가장 주목을 받는 인물이었고 지금도 그렇게 평가받고 있다. 지난 세기 동안 그는 철학에 관심이 있는 모든 사람들에게 관심의 초점이 되어 그에 관한 논문이 1955년을 기준으로 877편이 넘었다고 한다. 그는 독일 나치 치하에서 프라이부르크대학의 총장이 되었다가 종전 후 교수직마저 박탈당했지만, 그의 명성은 사라지지 않았다. 그는 『존재와 시간』이라는 유명한 저서를 발표하여 현대철학사에 새로운 이정표를 세웠다. 그리고 그는 시와 언어에 대해 남다른 관심을 보여 「횔덜린 시작품 해석」과 「언어는 말한다」그리고 여기에 번역 소개하는 「들길」과 같은 시가 있는 산문을 남겼다.

  그는 1889년 스위스에 가까운 독일 남부 삼림지대인 바덴, 메스키르히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세인트 마르틴 가톨릭 성당의 관리인이었다. 뒤에 떠났지만, 1905년 예수회에 들어가서 브리스가우에 있는 프라이부르크대학에 입학했다. 그는 여기서 능동적으로 활동적인 생활을 했고, 마을 사람들에게 그의 실존주의 사상을 나타내듯, "우리는 원하든지, 원치 않든지 간에 뿌리에서 자라 대기에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어야만 하는 식물이다."라는 P.S. 헤벨Hebel의 말을 인용했다고 한다. 

  1909년 그는 프라이부르크대학에서 신학에서 사용하는 해석학에서 "철학의 길"을 발견했다. 신학자는 성스러운 언어(sacred word)를 신의 뜻이 담긴 것으로 받아들이고 그것을 명확히 그리고 밝혀 신의 살아 있는 계시로 만들기 위해서 설명하려고 한다는 사실을 배웠다. 그래서 그는 철학을 공부하면서 존재가 무엇인가를 나타내기 위해 사색을 철학적 도구로 삼았다.

  하이데거는 박사학위 논문을 쓸 때까지는 그의 멘토가 에드먼드 후설로 잘못 알려질 만큼 현상학적인 자세를 취했다. 그러나 마르부르크대학에서 교수 초빙을 받을 때 즈음 그는 시간이 인간 지식을 얻는 데 조건이 되는 것 이상으로 "인간의 구조"를 형성하는 조건이 된다는 결론에 도달하게 된다.

  하이데거는 오랜 사색 끝에 1927년 『존재와 시간』을 발표하고 세계적인 철학자로 등장한다. 『존재와 시간』의 중심적인 사상은 그의 실존주의 철학의 핵심적인 주제인 존재론에 관한 것이다. 여기서 그가 말하는 인간 존재는 "현존재Dasein "에 관한 것이다. 현존재는 실존이란 말로 해석되는데, 미래의 가능성이 열려 있는 존재를 의미한다.

  첫째, 이것은 다른 존재와 관계를 맺는, "세계 안의 존재"를 말한다. 그렇다고 공간적인 것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이것은 모든 현존재의 근본구조 자체를 뜻하기 때문이다. 인간은 국가 · 가정 · 직장 등 자기에게 고유한 어떤 곳이 있다. 그리고 이 투여성投與性이야말로 그 근본구조에 해당된다. 현존재는 자기의 의지와는 무관하게 이 세계 안에 던져진 채 세상일에 골몰하게 된다. 현존재의 "세계 안의 존재"는 우연히 만들어진 것이 아니다. 현존재의 가장 깊은 "뿌리", 즉 "현존재"를 세계로 열려 있게 만드는 것은 "현존재" 그것 자체를 초월하기 위한 욕망이다. "현존재"는 다른 존재들과 관계를 맺음으로써 그것 자체를 초월한다. 다시 말하면, "현존재"는 특정한 실체를 초월해서 그것들이 전체적인 우주 안에서 유기적으로 결합되어 있는 것을 본다. "우주는 현존재에 의해 창조되지 않는다. 그러나 마치 지식은 지식인 없이는 생각할 수 없는 것처럼, 우주는 현존재 없이는 생각할 수 없다. 마치 지식인이 알아야 할 어떤 것이 없이 생각할 수 없는 것처럼. 인간은 세계에 던져져야만 자신의 가능성을 나타낼 수 있다."

  둘째, 인간은 다만 존재하는 것으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끊임없이 자기를 실현해야 하기 때문에 자기의 현존재에 대해 관심을 갖지 않을 수 없다. 다른 사람에게 관심을 쏟기도 하지만, 그것 역시 자기와 관련이 있을 때이고, 본래의 관심은 언제나 자기의 존재로 향하기 마련이다.

  셋째, 현존재는 염려다. 인간에게는 아는 것, 즉 지식과 미래에 대해 생각하는 것은 가능하지만, 인간 존재는 시간적으로 제한되어 있기 때문에 존재의 모든 것(인간의 모든 가능성)을 나타내는 데 한계가 있다. 하지만 인간은 시간에 의해 희생되지만, 또다른 한편 그것으로 인해 치열한 삶을 살 수 있는 특권을 누릴 수 있다. 인간은 죽음에 대해 공포와 허무를 경험하도록 되어 있지만, 그 경험을 통해서 자기의 고유한 삶을 자유롭고 책임 있게 이끌어 갈 수 있는 빛과 가능성 그리고 의미를 발견할 수 있는 기회를 얻을 수 있다.

  다시 말하면, 인간은 죽음으로 향하는 존재다. 그러나 이 죽음은 외부에서 오기보다는 처음부터 그와 함께하고 있다고 보아야 한다. 인간은 반드시 죽게 된다. 인간 역시 이 세상에 살기 시작한 그 순간부터 이미 죽음이 자신 가운데 잉태돼 있다고 봐야 한다. 인간의 불안은 자기 자신이 스스로 무가 되어 상실을 가져올지도 모른다는 다급한 심정에서 유래한다.

  그러나 한편 절대적인 한계점을 가지고 죽음을 바라본다는 것은 현존재만이 갖는, 의미심장하고 긴박한 문제이기도 하다. 만일 우리가 수명을 무한에게 늘릴 수 있다면, 우리는 그 어떤 것도 긴박하거나 중요한 것으로 느끼지 않을 것이다. 인간은 시간의 지평선 안에서 찰나를 살다가 죽을 수밖에 없다는 사실이야말로 가치 있는 삶을 살도록 깨닫게 한다.

  그런데 하이데거는 이러한 사색을 보인 이후(1930년 후반) 새로운 사상의 진화를 보여 주었다. 이때 그는 현존재가 아니라 존재 그 자체의 연구에 몰두, 존재 그 자체를 명확하게 하기 위해, 이를테면 횔덜린이 시어詩語로 말하고 있듯이 "성스러운 것" 속에 인간도 신도 존재하는 것이 분명하다는 사상을 주장했다.

 

  「들길」은 1950년에 발표된 작품이니까 그의 후기에 쓴 글이다. 이 글은 얼핏 하이데거의 유년 시절을 그린 소품小品처럼 보인다. 하지만 이 작품은 고향 풍경에 대한 사색뿐만 아니라, 그의 철학적 명제인 "현존재"에 관한 그의 철학적 사상뿐만 아니라, 존재 문제에 관한 후기의 사상을 함께 담고 있다. 하이데거는 이 작품에서 호젓한 들길을 걸으면서 그의 시야에 들어오는 풍경들 가운데 존재들의 현상학을 사색을 통해 그리고 있다. 그는 들길을 움직이지 않는 독립적인 존재로 보지 않고 "소리를 외치고" "호연지기를 나타내는 적극적인 존재"로서, 떡갈나무는 물론 "들녘을 뚫고 나 있는 외줄기 오솔길", 그리고 "길 위에 서 있는 십자가" 등과 관계를 맺고 하나의 세계를 형성하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 그리고 이어서 그는 이러한 실체들이 우주의 본질적 세계와 유기적으로 결합돼 있다는 것을 사색을 통해서 시적으로 나타내고 있다. 그래서 우리는 하이데거가 여기서 인간의 실존, 즉 "현존재" 문제는 물론 존재하는 모든 것의 본질, 즉 존재 그 자체를 탐색하고 있다는 것을 읽을 수 있다. 「들길」은 하이데거에게 존재하는 사물과 현상이 체념한 채 숨어 있듯이 가시적으로 나타내 보이지 않고 있지만, 내면적으로 존재하고 있다는 것을 시적으로 말해 주는 산문이 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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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문예바다』 2017-봄<해외 수필 읽기/ 해설>에서

  * 이태동/ 문학평론가, 서강대명예교수, 평론집 『나목의 꿈』『한국 현대시의 실체』등, 수필집『살아 있는 날의 축복』『우리를 기쁘게 하는 것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