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베리아 횡단열차
문혜진(文惠眞)
계약서를 앞에 두고 여자는
무를 썬다
무를 썰다 말고
시베리아 횡단열차를 이야기한다
동해에서 배를 타고
블라디보스톡에서 출발하는
시베리아 횡단열차 삼등칸에
덜컹거리는 육체를 싣고
무를 썬다
칙칙폭폭, 무를 썬다
무의 봉분
얼어버린 흙 속에서
산파처럼
쑥 뽑아 올린
희고 고요한 어깨가
무를 썬다
친친폭폭, 무를 썬다
너무 여위어 타들어가는
탁탁 튀는 어깨가
무를 썬다
천장 모서리 결로를 떠받치고
곰팡이 냄새를 풍기며
무를 썬다
채 썬 무가
눈 덮인 들판을 달린다
덜컹인다
별이 쏟아진다
별과 얼음 사이의 층간 소음
하바롭스크 역에 도착한다
무국이 끓어오른다
무국 속에서 풀어지는 봄동
말갛고 투명한
무의 심연이
눈 덮인 시베리아 벌판을 달린다
칼에 벤 손을 높이 쳐든다
흔든다
찢어진 살 속
피가 차올라
뚝뚝 떨어진다
내 눈은 더 이상 무를 보지 않는다
계약서를 넘긴다
종착지도 없이
창 밖 피다만 목련이
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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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사상』 2017-봄호 <시>에서
* 문혜진(文惠眞)/ 1976년 경북 김천 출생, 1996년 『문학사상』으로 등단, 시집『질 나쁜 연애』『혜성의 냄새』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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