잡지에서 읽은 시

권온_반복과 변주의 음악, 사물과 육체의 손깍지(발췌)/ 맨손 : 이정록

검지 정숙자 2017. 4. 2. 19:34

 

 

    맨손

 

    이정록

 

 

  처음 만났을 때

  손바닥에 모은 힘이 발꿈치로 다 빠져나가

  고개를 숙이고 무릎을 꿇었을 것이다.

  그건 벽한테 진 게 아니다.

  상체를 낮추는 건 벽을 넘는 기본자세다.

  고꾸라질 듯 밀고 가는 거다.

  누군 겸손하다며 머리를 쓰다듬을 것이고

  누군 계란으로 바위를 치다가 큰코다쳤다며 웃으리라.

  맨손에 얹히는 무게를 즐겨라.

  얼굴 돌리는 순간, 벽을 끝까지 쫓아 와서 짓누를 것이다.

  옹송그린 등짝을 파먹으며 덩치를 키울 것이다.

  벽도 외로워서 뜨거운 손바닥을 기다린다.

  바닥으로 갈앉아 맨발을 만나고 싶다.

  바람도 덩굴손도 담쟁이도 맨손 맨발이다.

  손바닥이 손바닥을 만나 사랑을 시작하고

  발바닥이 땅바닥을 만나 여행을 낳듯,

  벽은 부드러이 누워 뿌리를 받들고 별빛을 감싸고 싶다.

  올라보면 안다, 벽을 처음부터 비좁은 바닥이었음을.

  장미 가시나 깨진 병조각만으로 으스댔음을.

  벽을 만나면 벽의 뿌리에 이마를 들이대라.

  높이가 아니라 바닥이다.

  바닥만이 바닥을 넘는다.

     -전문-

 

  ▶ 반복과 변주의 음악, 사물과 육체의 손깍지(발췌)_ 권온/문학평론가

   '사물에 관한 시이자 '육체'에 관한 시가 여기에 있다. 이 작품은 '벽'에 몰두한다. 시인은 도합 7회 출현하는 '벽'이라는 '사물'에 집중한다. '사물'의 본질을 파악하려고 노력하는 이정록은 인간의 '육체'에 주목한다. '손바닥' '발바닥' '맨손'  '맨발'  '발꿈치'  '무릎'  '고개'  '상체' '머리' '얼굴' '등짝' '덩치' 등이 구체적인 육체의 목록이 된다./ 이 시의 '사물'과 '육체'가 손깍지처럼 긴밀하게 얽혀있다는 사실과 무관하지 않다. '사물'과 '육체'는 하나의 유기체를 이루며 꿈틀거린다. '육체'의 '힘'은 대단한 것이 아니어서 '벽'을 대하는 일은 언제나 버거운 형국(形局)이다. 곧 '계란'으로 '바위'를 치는 것과 같다./ "맨손에 얹히는 무게를 즐겨라"는 이정록이 독자들에게 전네는 핵심 메시지일 게다. "끝까지 쫓아 와서 짓누를" 벽의 '무게'를, "옹송그린 등짝을 파먹으로 덩치를 키울" 벽의 '무게'를 즐기라는 시인의 말을 우리는 어떻게 이해하면 좋을까? 이정록은 고통과 슬픔을 포함한 현실의 민얼굴을 껴안아야 한다고 말하는 게 아닐까?/ "벽도 외로워서 뜨거운 손바닥을 기다린다./ 바닥으로 갈앉아 맨발을 만나고 싶다."라는 일련의 진술은 '사물'의 갈망을 보여준다. '벽'은 '손바닥'을 기다리고, '맨발'과의 만남을 학수고대한다. 외로운 벽은, 고독한 벽은 이제 '뿌리'를, '바닥'을 지향한다. '벽'은 더 이상 한계나 장애 또는 단절을 의미하지 않는다. 그것은 이제 근본을 바라보고 근원을 꿈꾼다. 시인이 제안한 진술인 "바닥만이 바닥을 남는다."는 오늘날의 우리에게 유난스러운 감동을 준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높이가 아니라 바닥이다." 찬란한 높이만을 추구하다가 놓친 소중한 것들이 바닥에 흩어져있기 때문이다. 우리에게는 소외된 이웃과 더불어 사는 세상을 만들 수 있는 '맨손'이 있음을 기억해야 할 때이다.

 

     ----------------

   *『문학청춘』 2017-봄호 <집중특집>에서

   * 이정록/ 1964 충남 홍성 출생, 1989년 《대전일보》신춘문예-시, 1990년『한길문학』신인상-시, 1993년《동아일보》신춘문예-시 부문 등단, 시집『벌레의 집은 아늑하다』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은 것들의 목록』외, 시선집 『가슴이 시리다』, 산문집 『시인의 서랍』, 동화책『귀신골 송사리』『대단한 단추들』외, 동시집『콧구멍만 예쁘다』『지구의 맛』외, 그림책『똥방패』『달팽이학교』『만해동시그림책』외, 청소년시집『청춘연하장』, 집필 중『시로 쓰는 감성언어사전』, 김수영문학상 · 김달진문학상 등 다수 수상, 『주변인과 문학』편집위원

   * 권온/ 1974년 고려대 국어국문학과 박사과정 졸업, 2008년 『문학과사회』로 등단

 

'잡지에서 읽은 시' 카테고리의 다른 글

조건과 반응/ 황인찬  (0) 2017.04.02
혹이 사라질 즈음/ 김송포  (0) 2017.04.02
이병헌_정중동의 시학(발췌)/ 말의 입 : 곽경효  (0) 2017.04.01
밥당숙/ 박종현  (0) 2017.04.01
아마도, / 정온  (0) 2017.04.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