잡지에서 읽은 시

심은섭_멜랑콜리의 긍정적 생성 시학(발췌)/ 석고 캐스트 : 정영선

검지 정숙자 2017. 3. 29. 17:09

 

 

    석고 캐스트

 

    정영선

 

 

  몸이 울었던 구멍이다

  살려고 격렬히 뒤틀던 몸을

  죽음이 고요히 바라보던 구멍이다

  뛰어가다 엎드린 장딴지의 힘줄

  저기까지 가려고 뻗던 손

  급습하던 유황 냄새에 급히 코를 막던 포갠 손가락

 

  화쇄암이 덮친 자리

  술병은 새긴 그림을 붙들고 버티었다 이천여 년을

  도자기 그릇은 무늬와 함께 잔해를 지키었다

  문을 똑똑 두드릴 누군가를

  재를 덮어 쓰고서 기다렸다

 

  주검을 감싸준 옷이 사라졌다

  얼굴에서 어깨뼈, 팔다리로

  몸은 천천히 지워져 갔다

  사라진 자 속 사라진 자를 살던

  구멍만이 구멍으로 돌아가지 않았다

  갈망을 담던

  덜어도, 덜어내지지 않던 구멍들

  시간의 등을 타고

  나, 너 가슴에 구멍의 똬리를 틀었다

 

  너의 눈을 보면 가슴의 구멍이 보인다

  퍼내어도 남는 구멍의 슬픔

 

  몸 안 저토록 슬프고 아픈 자세를

  고고학자는 어떻게 찾아냈을까

    -전문-

 

  * 고고학자 피오렐리는 화산재가 덮인 구멍만 남은 자리에 석고를 부어 죽은 사람의 자세를 복원했음.

 

 

   문멜랑콜리melancholy의 긍정적 생성 시학(발췌) : 심은섭

   위의 「석고 캐스트」는 '석고 캐스트'가 지니고 있는 역할과 의미 전달에 주력한다. 유적들이 층층이 쌓여 있는 빈 공간에 석고를 들이 부어 당시 죽은 사람들의 모습을 복원하는 과학적인 발굴 방법으로 '석고 캐스트'를 사용한다. 화자(persona)는 석고 캐스트라는 수단으로 그 슬픔을 발굴하고, 발굴된 슬픔을 긍정적으로 노래한다. 생생한 죽음의 현장은 독자들의 가슴을 더욱 아프게 한다. 화덕에 그대로 남아 있는 불에 구운 빵과 술집 테이블 위에 남아 있는 작은 잔과 같은 것이 바로 그 슬픔을 슬프게 하는 현장이다. 그러므로 정영선 시인은 한가로운 시민들의 일상을 한순간에 참극으로 몰아넣은 급작스런 화산 폭발과 그로 인한 도시의 파괴라는 단순한 역사적 이야기가 아니라 죽은 자들에 대한 경건성과 위로의 노래를 들려주고 있다. 그래서 이 작품은 무겁고 침울한 장례식 음악이 될 수밖에 없다. 이 조곡弔哭은 화산재 속에 잠자는 사람들의 영혼이 최후의 삼판 날에 천국으로 구제되어 들어갈 수 있도록 기원하는 노래이다./ 시적 화자의 리얼리스틱한 상상력은 독자들을 과거로 안착하고 있다. "뛰어가다 엎드린 장딴지의 힘줄/ 저기까지 가려고 뻗던 손"에서 우리들은 섬뜩한 그 당시의 위급한 상황을 인식할 수 있다. 화자는 위급한 상황을 재현하려는 것이 아니라 "몸 안 저토록 슬프고 아픈 자세를" 찾아낸 고고학자를 통해 죽은 자들에 대한 후대의 우리들이 취할 최소한의 슬픔을 복원하려는 것이다. 또한 정영선 시인은 죽음에 대한 해답을 얻지 않고서는 진정 삶이 무엇인가를 규명할 수 없다는 인간의 경험적 영역과 지각적 영역의 차원을 뛰어넘으려는 당위성을 확보하려고 한다.

 

     ----------------

  *『시사사』2017. 1-2월호 <시사사 포커스>에서

  * 정영선/ 1995년 『현대시학』으로 등단

  * 심은섭/ 시인 · 문학평론가, 2004년 『심상』, 2006년 《경인일보》신춘문예에 시 부문 등단, 2008년 『시와세계』로 평론 부문 등단, 시집『K과장이 노량진으로 간 까닭』, 저서『달빛물결』『한국현대시의 표정과 불온성』등 다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