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백과 고백 사이
- 밸런타인데이, 투 섬 플레이스에서
구광렬
누군가 기원전紀元前의 말 한 마리를 몰고 와선 그를 싣고 떠나줬
으면 했다. 도무지 부활의 희망이나 의지를 보여주지 않던 그 성당
의 예수상, 아니 예수.
기쁜 날에도 그를 보면 슬퍼졌다. 복도를 지날 때면 피를 철철 흘
리는 모습이 하 애처로워 손발에 박힌 못이라도 빼주고 싶었다
그럼에도 난, 그 성당을 오래 다녔다. 술을 마시고 포커를 치는
예수보다 더 신神 같던 사제 때문이다
쿠바 산 시가를 빨다가 위스키가 담긴 콜라 병을 들이키며 그가
한 말: 죄는 물론이고 벌 또한 인간의 짓이다. 신의 짓이 아니다.
세 번씩이나 부인해줄 베드로 같은 신자는 못 뒀지만 히든카드를
들여다보는 그의 쪽 째진 눈망울에선 차라리 부활의 의지를 엿볼
수 있었다. 어쨌든 그 신부, 예수보다 먼저 세상을 떴고 지금까지
부활했다는 소문은 없다
그럼에도 난, 계속 성당을 다녔다. 마리아보다 더 성모聖母 같던
수녀 때문이다. '형제님, 형제님' 부르는 그녀의 목소리엔 내 어머
니에 결핍됐던 살가움이 들어있었다
내 나이 열일곱, 마침내 그녀를 사랑했다. 검은 수녀복은 총천연
색으로 보이고 달력엔 성당 가는 날이 유난히도 빨갛게 칠해졌다
하나 짝사랑이었다. 그녀, 나보다 예수, 아니 예수상을 더 사랑했
다. 날 보곤 웃었지만 그를 보곤 울었다
지금 난, 듬뿍 얹힌 휘핑크림 너머 그 성당을 바라본다. 마당엔
여전히 석녀石女 마리아가 보이건만 복도엔 그가 있을까? 그 그림
자 말이다. 회랑 끝까지 죽 늘어지던 검은 뿌리 같던, 도굴된 시체
를 세워 놓은 듯해 다시 묻어주고 싶던.
아니, 그 또한 신이었을 거다. 신 없으면 기원후紀元後 인간이 신
이 되려 드니까
혼자 있어도 함께 있는 느낌, 그래서 난 이곳을 즐겨 찾는다
그래, 그녀 또한 날 사랑했을지 모른다. 에스프레소의 쌉싸래함
과 녹아드는 생크림의 단맛이 어우러지고 있잖아
----------------
*『시인시대』 2017-봄호 <신작시>에서
* 구광렬/ 1986년 멕시코 문예지『EI Punto(마침표)』에 시 「켓찰코아틀(Quechalcoati)」등을 발표하고 · 국내에선 오월문학상 수상과 함께『현대문학』에 시「들꽃」을 발표함. 시집『슬프다 할 뻔 했다』, 스페인어 시집 『La tierra mas alta que el cielo, 하늘보다 높은 땅』외
'잡지에서 읽은 시' 카테고리의 다른 글
| 누가 내 악몽을 키웠나/ 김태우 (0) | 2017.03.23 |
|---|---|
| 이종교배/ 김태우 (0) | 2017.03.23 |
| 버려진 시집, 그 위로 내리는 비/ 이윤홍 (2) | 2017.03.22 |
| 어항/ 윤진모 (0) | 2017.03.22 |
| 심장을 겨냥하다/ 윤진모 (0) | 2017.03.2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