잡지에서 읽은 시

버려진 시집, 그 위로 내리는 비/ 이윤홍

검지 정숙자 2017. 3. 22. 21:02

 

 

    버려진 시집, 그 위로 내리는 비

 

    이윤홍

 

 

  시집이

  쓰레기통 밖에서 비를 맞고 있다

  그 시집은

  시인이 짧은 생의 절정에서 뜨거운 피로 쓴 노래들

  한때는,

  절망의 눈으로

  절벽 같던 세상을 희망 없이 바라보던 녀석의

  비굴한 정신을 후려치던 죽비

  누항(陋巷)의 어느 주막

  녀석이 밤새 흘린 눈물 속에 생생히 살아있던,

  그러나 지금은 배부른 방안 화려한 책장 한 구석에 처박혀

  허구한 날 셀폰을 주고받는 문자만도 못한

  깜깜하게 잊혀진 노래

 

  녀석은 알고 있었다

 

  시(詩)는 또 하나의 계륵(鷄肋)

  시(詩)는 쓰레기통 안에서 쓰레기와 섞이기는 조금은

  고상한 존재

  해도, 내던져서는 안 될 만큼 중요한 시도 시집도

  이 세상에는 없다

  문틈으로 반쯤 나온 녀석의 기름진 통통한 하얀 손이

  무심히 빗나간 듯 보였으나 숨기려던 고의는

  숨길 수가 없었다

 

  늦은 오후가 맹렬하게 끌어내리는 어둠이

  저녁보다 빠르게 보도로 내려서고

  뱃속까지 열려있는 쓰레기통이

  시궁창보다 더 지독한 냄새를 풀풀 풍기고 있을 때

  비는 퉁퉁 불은 시들을

  하나씩 둘씩 땅속으로 흘려보내고

  젊어서, 한 잔 쐬주로도 온통 사랑이었던

  시인의 노래를 다시 엮고 있다

  이제는 녀석도 읽을 수 없는,

  절판된 문고(文庫)로 주룩주룩 새롭게 엮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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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와정신』 2017-봄호_미주문학 특집 <신작시>에서

    * 이윤홍/ 2002년 《미주한국일보》시 당선, 2012년《미주한국일보》소설 당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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