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면놀이
이정자
여자가 미처 옷가지를 챙겨 입기도 전에
사내가 벌컥 문을 열어제쳤다
순간, 놀란 건
방 안에 뒹굴던 여자가 아니라
창밖에 있던 나무와 바람과 햇살이었다
꽃아,
엎지른 마음을 누가 볼세라
허겁지겁 주워 입고 있는
철없는 꽃아,
나무야 보고도 못 본 척 눈감으면 그만이지만
저기 저 간지러운 바람의 입을 어쩔 것인가
한참도 아닌 조금만 흘러가보면 안다
강물이
물안개로 장막을 치고 있는 이유를
해설> 한 문장: 그런 시가 있다. 화려한 수사나 의미심장한 어휘를 사금파리처럼 사방에 심어놓지 않아도, 이해와 오해가 반반일 수밖에 없는 복잡한 기교를 곳곳에 매설해놓지 않고도, 시를 읽는 이의 마음을 부드럽게 때로는 위태롭게 이끌어가는 그런 시가 있다. 시인의 가녀린 목소리가 퍼져 나오는 그 작은 울림(스밈)만으로도 어느새 독자의 가슴을 후벼파는 시. 그런 시를 만날 때의 행복은 욕망을 성취했을 때의 기쁨보다 크다. 하물며 욕망마저도 하나의 장신구로 만들어버리는 독특한 연금술을 덤으로 읽을 수 있는 시라면 그 행복은 배가 될 것이다. (고영/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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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집『그윽』에서/ 2016. 11. 11. <문학의전당> 펴냄
* 이정자/ 2005년 시집『능소화 감옥』으로 작품 활동 시작, 시집『아름다운 것은 길을 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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