잡지에서 읽은 시

문명의 탁자/ 정숙자

검지 정숙자 2017. 3. 9. 01:20

 

 

    문명의 탁자

 

     정숙자

 

 

  아직, 또 다른 지구는 없다고 한다

 

  발 닿는 곳마다 경쟁이 붙고

  심장 근처엔 비극이 산다

 

  약육강식,

  가차 없는 질서

  그런데도 우리는 이 구석을 ‘아름답다’ 덮는다

 

  멀리서 보면 푸른빛이라 한다

 

  약육강식은 그렇다 치고, 강육약식(强肉弱食)도 엄연히 존재하는 비

탈을 우리는 먹어야 한다. 지금 움직이는 우리 모두는 아예 태어나지

못했거나 앞서 사라진 자보다 훨씬 강했다는 검증이지만, 어느 누구

도 고통이 멎지 않는다.

 

  썩은 것은 썩어서 썩고, 안 썩은 건 안 썩어서 썩는다

 

  달에 토끼가 살지 않는다는 건 얼마나 희소식인가. 거기 토끼가 있

었다면 나는 달이 떠오를 때마다 눅눅했을 것이다. 토끼가 저녁은 때

웠는지, 낮 동안 친구들과 사이좋게 뛰놀았는지, 수토끼와 암토끼가

갈등을 겪고 있지나 않은지,

 

  풀은 넉넉한지

  춥지는 않은지

  이슬들은 깨끗한지

  천적(天敵)이 노리는 건 아닌지

  빨간 눈동자가 검어지지는 않았는지

  뿔 달린 돌연변이가 나오지는 않았는지

  똥 천지가 되어 흰 털이 개털이 되지는 않았는지

 

  생명이란, 생활이란 이 모든 섬유를 거느리는 게 아닌가

 

  생각의 극장에서는 어떤 초기화도 어렵지 않다

 

 

     -----------------

  *『시에티카2017-상반기호 <시에티카 초대시>에서

  * 정숙자/ 전북 김제 출생, 1988년 『문학정신』으로 등단, 시집『뿌리 깊은 달』『열매보다 강한 잎』외, 산문집『행복음자리표』『밝은음자리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