응시하는 사람
오은
벌판이 있다 드넓다 그 위를 말이 달린다 자유롭다 나무 한 그
루가 서 있다 푸르다 생동감 있다 바로 옆에 나무 한 그루가 누워
있다 노랗다 멋들어지다 서서, 누워서, 나무 두 그루가 다정하다
실은
말은 쫓기고 있었다 말은 신변에 위협을 느꼈다 벌판이 드넓
어서 달리는 데 문제는 없었다 숨을 데도 없다는 게 문제라면 문
제였다 다행이자 불행이었다 말을 잡으려는 대상이 있었다 그게
누군지 말만 안다는 게 가장 큰 문제였다 자유롭지 않아서 맹렬
히 달렸다 자유를 위해 사력을 다해 달리는 중이었다
아무도 괜찮으냐고 묻지 않았다
나무는 살려고 애쓰는 중이었다 뿌리가 서로 얽히고설켜 어떻
게 풀어야 할지 난감했다 누워 있는 나무가 서 있는 나무를 잡아
끌었다 서 있는 나무는 더 자라려고 정수리에 온 기운을 모으고
있었다 생동감을 잃지 않기 위해, 다정함을 유지하기 위해 버티
고 있었다 어떻게든 눕히려는 나무와 어떻게든 눕지 않으려는
나무가 있었다 두 그루가 사투를 벌이는 중이었다
무엇이 변했느냐고 묻는 사람도 없었다
벌판 구석에 가서 쪼그려 앉았다
말은 여전히 달리고 있을 것이다
나무 두 그루는 푸르고 노랗게 다정할 것이다
장면을 완성하는 이는
그것을 보는 사람이다
겨울철, 소변을 볼 때마다 내 몸에서 따뜻한 것이 모조리 빠져
나가는 느낌이었다
-전문-
▶ 꿈 밖에서 꿈꾸다(발췌) _ 김영임
롤랑 바르트(Roland Barthes)는 사전에 관한 그의 책(롤랑 바르트, 김웅권 역, 『밝은 방』, 동문선, 2006, pp. 136-140.)에 '시선'에 관한 짧은 글을 싣고 있다. 바르트는 '쳐다보는 행위'(regarder)와 '보는 행위'(voir)의 차이를 설명하면서 시선이 향하고 있는 '외부'가 아닌 '내부'에 애해 이야기한다. 외부 사물에 대한 주체의 시선이 실제로는 사물과 관계하지 않은 채, 역으로 주체의 내면을 향해 붙들려 있을 수 있으며 그것이 '시선'이라는 것이다. 바르트가 예시로 들고 있는 케르테스의 한 사진을 보자. / (사진: A 케르테스, <강아지>, 파리, 1928년) <☜ 사진, 책에서 참고 바랍니다-정숙자> / 소년은 무엇을 쳐다보고 있는 것일까? 아마도 자기가 안고 있는 갓 태어난 강아지와 사진사를 쳐다보고 있는 것일 게다. 바르트는 "사실 그는 아무것도 바라보지 않는다. 그는 자신의 사랑, 자신의 두려움을 내면을 향해 붙들어 매고 있다. 이것이 바로 시선이다."라고 분석하고 있다 '시선'은 이렇듯 외부로 향하고 있지만 그것의 끝점은 주체의 내면이다. / 시로 돌아가 보자. 끝없이 펼쳐진 들판에 질주하고 있는 말과 두 그루의 나무가 보인다. 시각의 이미지로 그려지는 말은 자유롭다. 나무들은 각각 푸르고 노랗게 멋들어진 색으로 서서, 누워 다정하다. 그러다 갑자기 말의 질주가 드러난다. '실은' 말의 전력질주는 자유의 만끽을 위해서가 아니라 자유의 쟁취를 위해서다. 두 나무 역시 벗어나려는 혹은 놓치지 않으려는 둘 사이의 긴장감을 생동감과 다정함으로 위장하고 있다. 그러나 아무도 그들에게 "괜찮으냐"고, "무엇이 변했느냐"고 묻지 않는다. 그들을 보고 있는 이는 누구인가? / 이 그림 속에는 한 사람이 더 있다. "벌판 구석에 가서 쪼그려 앉"아 있는 한 사람이 있다. 이 사람의 눈은 말과 나무들을 향해 있다. 그는 지금 말의 사투와 나무들의 엉킨 뿌리에 대한 비밀을 읽어내는 중인가? 그는 자연의 비밀을 읽어낼 수 있는 혜안을 가진 것인가? 그리고 진정 말과 나무들은 사투 중인 것인가? / 바르트의 해석대로라면 그는 말과 나무를 보고 있지 않다. 말과 나무에 가닿아 있는 그의 시선은 자신의 지독한 외로움과 생존의 고통을 붙들어 매고 있을 뿐이다. 말과 나무의 사투는 '실은' 그의 것이다. 하지만 아무도 그에게 "괜찮으냐고", "무엇이 변했느냐고" 묻지 않는다. 시의 말미에서 그의 고독은 시각에서 통각으로 옮겨온다. "겨울철, 소변을 볼 때마다 내 몸에서 따뜻한 것이 모조리 빠져나가는 느낌이 들었다". 다른 말을 덧붙이지 않아도 '쪼그려 앉은' 이 사람의 상실감이 나에게 오롯이 전달되는 것처럼 몸이 시리다. '소변'을 보는 시의 마무리는 그의 외로움에서 미처 빠져나오지 못한 나에게 아이의 웃음을 동시에 가져다 준다. / 그림을 좀 더 확대해서 보자. 말, 두 나무, 그것들의 배경으로 그려질 들판과 하늘, 구석에 쪼그려 앉은 사람, 그를 보고 있는 시적 화자, 시 어딘가에 어른거리고 있을 시인 그리고 시를 읽고 있는 이까지 포함시키면 이 시에는 수많은 시선들이 교차하고 있다. 그리고 시선들은 서로를 쳐다보고 있지만 '보고' 있지 않다. 저마다 자신의 내면을 향해 있을 시선으로 한 가지 그림을 보고 있을 것이다. 그중 어느 시선이어도 좋다. 어느 시선으로 읽어도 좋다. 그러면 말과 두 나무의 평온한 그림은 '실은' 이후로 다시 쓰일 수 있을 것이다. 시인의 말처럼 세상의 "장면을 완성하는 이는/ 그것을 보는 사람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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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동네』 2017-3월호 <특집/ 신작시>에서
* 오은/ 1982년 전북 정읍 출생, 2002년 『현대시』로 등단, 시집 『호텔 타쉘의 돼지들』『유에서 유』등
* 김영임/ 2016년『문학과사회』평론 등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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