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너지
서윤후
얼음을 줍고 있었다 손에 가득 쥐가 천천히 사라졌고
두 뺨은 붉어졌다 내게도 아직 에너지가 남아 있다
풍차가 온몸으로 떠들고
언덕을 밀어내듯 바람을 일으킨다
오늘 치의 언덕을 올라야 했던 순록 떼가 뿔을 눕힌다
구름을 상대한다
눈보라가 내리고 길이 사라진다 발자국이 차오른다
벽난로를 지피는 집집마다
연기가 피어오른다
연기는 바람을 돕는다
얼어 있던 손을 호주머니에 넣는다
체온은 나를 버릴지도 모른다
얼음을 입에 문 목동이 나를 찾는 휘파람 분다
물이었을 때를 잊어가는 얼음장에서
깨지는 자리마다 길이 열린다
나는 나를 따라나서지 않는다
-전문, (『어느 누구의 모든 동생』, 2016.)
▶ '들뢰즈적'으로 읽는, '앙띠 들뢰즈'적 시(인)들 <발췌> _ 기혁
익히 알려진 바대로 서양 예술사에서 낭만주의적 입장에 선 예술가들은 절대성을 추구하는 존재들이었지만, 이후의 사실주의적 입장에 선 예술가들은 그러한 절대성을 추구하기 위한 위선이나 이면의 기만까지도 모두 진실의 영역으로 포섭하고자 했다. 우리 시단의 경우도 '비성년'의 목소리로 낭만성을 드러냈던 2000년대의 시인들이 있었다면, 2010년대의 시인들은 그러한 낭만성의 지평 위에 현실을 투사하고 진실을 추구하는 입장에 서 있는 것처럼 보인다. 서윤후의 "소년성(小年性)" 역시 '비성년'을 이어받으면서도 어떻게 그것을 극복하고 있는지 가늠해 볼 수 있다. / 시인은 "얼음을 줍고 있었다"는 사소한 사건으로부터 "두 뺨은 붉어"지는 부끄러움을 느낀다. 그러나 그러한 부끄러움은 외부(얼굴)로 드러내는 순간 "에너지"로 전환되어 "나는 나를 따라나서지 않는다"는 번복을 가능하게 한다. 앞서「소년성(小年性)」에서 "나는 나의 목격자가 되었다"(서윤후,「소년성(小年性)『어느 누구의 모든 동생』)는 사건으로부터 입장을 번복할 "에너지"를 획득하는 것이다." 소년(小年)"에게는 실패한 혁명가의 초상이나 어린아이의 짓궂은 변덕을 찾아보기 힘들다. 그러한 번복은 분열된 주체를 야기하는 대신 무대에 오르기 위한 연기(演技)의 의지로써 작동한다. 시(인)가 절대적이고 투명하다고 믿어 온 '기대'들 앞에서, 혹은 그 기대가 낳은 절망들 앞에서, 시인은 스스로를 번복함으로써 우리에게 현전하는 진실을 되돌려 준다. 실재와 재현의 경계를 허물고, 무대 밖뿐 아니라 무대 위에서조차 뜬금없어 보이는 사건들, 거창하기는커녕 접속의 경계 면조차 상상하기 어려운 사건들을 연쇄시키는 시인에게서 현실의 재현을 위한 몸짓은 찾아보기 어렵다. 너무나 동떨어져 보이는 사건들의 연쇄가 바로 "소년(小年)"을 존재하도록 하는 "에너지"를 발생시키는 것이다. 그러한 "에너지"는 접속으로부터의미를 생성하는 들뢰즈적 '사건화'와 다른 양상을 보인다. 애초에 시인이 존재하도록 한 것은 '少年'이 아닌 "小年"이었고(진리가 아닌 오류), 그러한 오류를 그대로 현전시켜 실재와 재현의 공명(종합)에 이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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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간 파란』2016-가을호 <issue 들뢰즈>에서
* 기혁/ 2010년 『시인세계』로 시, 2013년《세계일보》로 문학평론 등단, 시집 『모스크바 예술극장의 기립박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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