잡지에서 읽은 시

수염이라는 남자/ 박해람

검지 정숙자 2017. 2. 5. 21:23

 

 

    수염이라는 남자

 

    박해람(朴解纜)

 

 

  회화(繪畵)라고 써놓고

  면도칼을 간다.

 

  죽은 사람의 수염을 깎을 때 관목지대에서 흰 자작나무가 흔들렸고 칼

끝에서 조롱조롱(嘲弄)소리가 났다.

 

  낙화의 속도를 즐겨 그렸던 탓에 분별없는 붓을 지니고 다녔다.

  독촉 받은 삽화(揷畵)

  아마포처럼 저 혼자 쓸쓸한 감촉이고

  검은 소묘에 흰 채색이 드문드문 섞여 있다.

 

  철없는 누이와 살림을 차렸던 매형은

  집 근처 농업고등학교에서 훈고학(訓詁學)을 가르쳤었다.

  수염은 말의 자전(字典)이어서

  힘없는 겉장을 열고 잊힌 말 쪽으로 부드럽다.

 

  수염은 표정의 일종으로 자주 사람의 얼굴을 바꾸지만 냉소(冷笑) 쪽으로

휘어지는 북향이다. 낮게 내려온 지붕의 끝 같기도 하고 열어젖힌 창문의

커튼 같기도 하다. 수염은 죽은 사람의 유일한 좌우대칭이었고 또 얼굴의

의복이어서 묻는 것들이 많았다. 소매에 묻은, 헛손질 끝에 매달려 떨리는

(齒)를 가려주던 차양.

 

  입술이, 굳어진 말이라면

  이제 입 속은 독방이 되었을 것이다.

 

  면도칼에 묻는 한 방울의 피는 아무런 의사가 없다.

 

  죽은 사람은 평생

  거울 속, 한 남자의 수염을 깎아주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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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문학사상』2017-2월호 <시>에서

  * 박해람(朴解纜)/ 1968년 강원도 강릉 출생, 1998년『문학사상』으로 등단, 시집『낡은 침대의 배후가 되어가는 사내내』『백 리를 기다리는 말』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