잡지에서 읽은 시

혐오 사전/ 유진목

검지 정숙자 2017. 1. 28. 19:16

 

 

    혐오 사전

 

    유진목

 

 

  나는 그의 인격이 살해되어 마땅하다고 여깁니다 그가 만든 허상의 인격이든 그 허상에 숨어 추악한 범죄를 저지른 인격이든 어느 쪽도 살아 있을 가치가 없습니다 이 사실을 스스로 깨닫는 것이 그나마 존엄을 지키는 일일 겁니다 그러고 보면 나는 지금 타인의 존엄을 심각하게 훼손하고 있습니다 그의 존엄을 위해서라도 이걸 보지 못하도록 해야 하는 게 아닌가 싶습니다

 

  아닙니다 천만에요 혼자서 죽이고 혼자서 죽으면 됩니다 남에게 그렇게 많은 것을 바라면 안 됩니다 사람은 염치를 가져야 합니다 이것이 남의 힘을 빌지 않고 스스로 가지고 있는 것으로 존엄을 지킬 수 있는 방법이라고 생각합니다 남에게 이제까지 피해를 입히고서 그런 일까지 해 달라고 하면 안 되지요 혼자서 죽이고 혼자서 죽은 다음에도 한참을 죽어서 있어야 합니다 이렇게 있다가는 정말로 죽겠다 싶을 때까지 있어야 합니다

 

  글쎄요 무얼 하며 있으면 좋을까요 딱히 숨을 쉬고 있으면 되겠지요 밥을 먹고 잠을 자고 뭐 그런 것들을 하면서요 사실 이 부분은 정말 부럽습니다 이제껏 관계를 맺으며 사용했던 인격은 모두 죽었으므로 달리 할 수 있는 게 그런 것들뿐이군요. 자기자신과 하는 일들 말입니다 그런 다음 거기서 살아남은 것을 잘 살펴야 합니다

 

  남아 있는 게 별로 없을 겁니다 밥을 먹을 때 오른손으로 먹는다든지 혼자서 밥을 먹고 있으면 세상에 버려진 기분이 든다든지 시금치는 한번도 좋았던 적이 없다든지 커피는 남들이 마시니까 마신다든지 붉은 계열의 옷은 어쩐지 입지 않게 된다든지 하는 것들이 남겠지요 그가 부디 시금치를 좋아했으면 좋겠군요 그런 것들이 남은 자신과 함께 살아가야 합니다. 점점 그것을 늘려가면서 자신의 삶을 다시 채워가면 되겠습니다. 

 

  그것대로 가혹한 삶이라 할 수 있겠지요 그러나 그것은 나의 알 바가 아닙니다 누구의 알 바도 아니라고 이 자리를 빌어 말해 두고 싶습니다

 

  그것을 가혹하게 느끼는 사람에게 오히려 나는 두려움을 느낍니다. 이 말을 하지 않을 수 없군요 실은 깊은 혐오를 느낍니다 그들은 갑자기 문을 두드리고는 제집처럼 드나들기 시작합니다 예의는 결코 환대가 아닌데요 그들과 있으면 내가 하염없이 죽어가는 것을 느낍니다.

 

  남에게 하듯이 어디 한번 그것을 죽여 보라고 말하고 싶군요 그때는 당신 자신을 죽여야 할 겁니다

 

  그래요 이미 오래 전에 죽어 버렸는지도 모르겠군요 그렇다면 남아 있는 삶도 없을 테지요 그러나 그것은 나의 알 바가 아닙니다 누구의 알 바도 아니라고 말했습니다 그의 인격은 살해되는 편이 여러모로 좋습니다

 

  자 이제 그만하지요 우리의 이야기로도 시간은 모자랍니다 그런데 내가 모자를 좋아한다고 말했던가요 나는 모자를 쓰고 거을을 보며 말했습니다 바보 같은 짓은 절대로 하지 말아야 한다 언제나 나는 모자에 걸맞은 삶을 살고 싶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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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계간 파란』/ 2016-겨울호, 분노/ <poem>에서

  * 유진목/ 2016년『연애의 책』으로 시 등단, 시집『강릉 하슬라 블라디보스토크』『연애의 책』등, '목년사'에서 영화를 만들고 글을 쓰고 있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