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고 시인의 시

정철훈_삼천 원이 없어 시인이 된 박재삼

검지 정숙자 2017. 1. 11. 01:48

 

 

    삼천 원이 없어 시인이 된 박재삼(1933~1997, 64세)

 

    정철훈

 

 

  내가 문학 기자로서 첫 오비추어리를 쓴 것은 박재삼 시인의 부고를 접한 1997년 6월 8일의 일이다. 박재삼 시인은 1995년 백일장 심사 도중 신부전증으로 쓰러져 투병생활을 해왔고 그를 돕기 위해 노향림 시인이 주축이 된 모금운동이 펼쳐졌으며 그의 고향 삼천포 지역주민들도 성금을 모아 전달하기도 했다. 그만큼 그의 죽음은 남다른 의미가 있었다. 신인의 탄생을 위한 백일장에서 쓰러졌다는 게 그것이다. 박재삼 또한 열일곱 살 때 진주에서 개최된 제1회 영남예술제에서 시조 「촉석루」로 차상에 입선한 백일장 출신이기도 하다.

  너무 이른 죽음이었기에 생전에 만날 기회도 없었던 그의 오비추어리를 쓰기 위해 탄생에서 죽음에 이르는 작가 연보를 뒤지던 기억이 지금도 생생하다. 박재삼 선생은 떠올릴 때 '삼천 원의 시인'이라는 이미지가 먼저 뇌리를 스치는 것은 연보 떄문이다.

 

  1933년 아버지 박찬홍과 어머니 김어지의 둘째 아들로

일본 도쿄에서 출생.

  1936년 가족 모두가 귀국해 경남 삼천포시에 정착.

  1946년 삼천포국민학교 졸업 후 입학금 삼천 원이 없어 삼천

포중학교로 진학을 못하고 삼천포여중에 사환으로 들어감.

 

  나는 '삼천 원이 없어'라는 대목에 코를 박고 만다. 박재삼의 부친 박찬홍은 '수부(水夫)', 즉 배에서 허드렛일을 하는 잡부는 물론 삼천포에서 모래 채취 노동을 하며 생계를 꾸려갔다고 한다. 그런 어려운 생활 속에서도 박재삼은 국민학교 때 1등을 놓치지 않았고 생활기록부엔 '두뇌가 명석하고 재능이 뛰어난 천재'라고 적혀져 있었다. 실력으로는 능히 가고도 남았을 중학교에 기부금 '삼천 원'이 없어 진학을 못하고 그는 신문배달을 하게 된다. 그 무렵, 삼천포여중 가사 담당 여선생이 학교 사환 자리를 소년 박재삼에세 소개한 덕분에 낮에는 사환 일을 보고 저녁엔 삼천포중학교 병설 야간중학교에서 공부를 할 수 있었다.

  마침 그 학교 국어교사로 있던 시조시인 김상옥의 첫 시조집 『초적(草笛)』을 공책에 베껴 애송하며 시를 쓰기 시작한 그는 삼천포고등학교를 졸업한 이듬해인 1954년 김상옥의 소개로 창간 작업을 하고 있던 현대문학사에 들어간다. 이때도 편집 일이 아닌 허드렛일을 하는 사환 격이었다. 이후 1955년 고려대 국문과 1학년 때 시조 「섭리(攝理)」가 유치환에 의해 2회 추천, 그리고 시 「정적(靜寂)」이 서정주에 의해 『현대문학』에 최종 추천되어 문단에 데뷔한다.

  하지만 잦은 결석으로 고려대 3학년 재학 중 등교정지처분에 이어 제적을 당할 만큼 그는 생활전선에 뛰어들어야 했다.문예춘추사, 삼중당, 월간『바둑』,《대한일보》바둑기자 등을 전전하던 그가 어느 정도 안정된 생활에 접어든 것은 서울 동대문구 답십리동 11-83번지에 처음으로 집을 마련하면서이다.

 

 

  동대문구 답십리동 11의 83

  내가 전에 살았던

  이 번지수를 기억하는 사람은

  우리 식구 말고

  한 사람의 집배원이었다.

  숨을 몰아쉬는 가파른 그 언덕에는

  거기에 집이 있는 사람들과

  낮에는 몇몇 행상들과

  집배원이 집에 올 뿐

  그리고는 이 세상에서

  가장 귀한 밝은 햇빛과 빛나는 바람이

  수시로 드나들고 있었다.

  그것은 하늘하고만 제일 가까운 것을

  속으로 자랑하고 있었던 것이 아니었을까.

  그 막다른 골목에서

  마지막으로 배달을 마친 집배원을 불러

  어쩌다가 소주 대접을 했었다.

  거기서 우리는 이사해 왔다.

  그러나 우편물은 이사 가자 그리로 바로 오는 편지를

  그 집배원이 배려해 주었다.

    -박재삼, 「어느 집배원을 생각하며」부분

 

 

  답십리 언덕배기를 숨을 몰아쉰 채 오르내리며 마지막 우편물을 전해주고 가는 집배원에게 소주 한 잔을 대접했다는 대목은 어떤 치기도, 기교도 없는 맑은 영혼의 소유자가 박재삼임을 단박에 알 수 있게 한다. "마음이 가난한 사람은 복이 있나니 하늘나라가 그들의 것이다"(마태복음 5장 3절)라는 성경 구절에 빗댈 필요도 없이 마음이 가난하다는 말의 진가는 요즘처럼 번다한 기교의 시를 쓰는 시단에서는 찾아보기 어려운 게 사실이다.

  흔히 박재삼의 대표시를 말할 때 "이제는 미칠 일 하나로 바다에 다와 가는/ 소리 죽은 가을 강을 처음 보겠네"라고 노래한 초기 시 「울음이 타는 가을 강」(『사상계』, 1959)을 꼽지만 그와 더불어 나는 개인적으로 고혈압과 위궤양으로 잦은 병치레를 하던 그의 말년 작품에 눈길이 가곤 한다. 요즘 나는 침대 맡 서가에 꽂혀 있는 박재삼의 열세 번째 시집 『꽃은 푸른 빛을 피하고』를 잠자리에 누워 가끔 꺼내보면서 작은 위안을 받는다.

 

  푸르다는 것은

  대지의 기름기를 가리지 않고

  흠뻑 빨아들여서

  숨이 차도록 될 때

  비로소 내뱉는 빛인가,

  거기에는 늘

  왕성한 것만 중심으로

  엉겨드는 것이네.

  풀잎이나 나뭇잎이 내뱉는

  그 한 빛깔을 보아라.

  가장 아름다운

  꽃 언저리에 와서는

  그런 전심전력이 아니라,

  어쩌면 꺼질 것만 같은

  가장 연약한 기운을 타고

  제일 높은 데 올라와서는

  빨강이나 노랑

  또는 흰빛은 취하건만

  푸른빛 하나는 피하고 없네.

     -박재삼, 「꽃은 푸른빛을 피하고」, 전문

 

 

  1991년 출간된 이 시집이 언제 수중에 들어왔는지는 정확히 기억나지 않지만 어쩌면 그의 오비어추리를 쓰기 위해 서점에서 구입했던 것도 같다. 그때는 내가 늦깎이로 막 등단을 한 직후였고 자꾸 거시안적이고 스케일이 큰 작품을 쓰려고 할 때여서 우리 생활 주변의 소소한 소재를 다루고 있는 이 시집이 눈에 들어오지 않았던 것 같다. 이 시집을 묶을 당시 그는 이사를 가서 동대문구 묵동 177-3번지에 살고 있었으니 묵동 시절에 작은 화단에 핀 꽃송이를 보고 이 시를 썼을지도 모를 일이다.

  시를 읽으면서 나 역시 어느새 박재삼이 이 시를 쓴 나이에 이르렀다는 데 새삼 놀라게 된다. 꽃도 빨강이나 노랑, 흰빛은 취하고 푸른빛은 피하는데, 하물며 호모사피엔스인 내가 삼가야 할 게 무엇일까를 곰곰 생각하게 하는 시가 아닐 수 없다. 시집에 쓴 박재삼의 자서(自序)에서도 그의 투명한 시심이 묻어난다.

 

  이게 내 열세 권째의 시집이 된다. 나로서는 그 사이 고혈

압과 위궤양에 시달려서 그런지 한다고는 했지만, 결국은 알찬

열매를 거두어들이기는커녕 쭉정이만 바구니에 남은 셈이다.

그러나 이렇게 하는 것이 내 실력이고 보니, 이제 와서 늦게나

마 불가항력을 세월 속에 느끼는 것이라고나 할까. 이런 장삿속

도 없는 시집을 내준다는 것이 나로서는 그저 부끄러울 뿐이다.

 

 

  평생 변변한 직장 하나 없이 여러 출판사를 옮겨 다니며 서푼도 안 되는 집필료나 일어 번역료를 받아 가난하게 살다 간 박재삼. 한국의 정한을 노래한 마지막 시인으로 기록될 만큼 한국적인 정서가 그대로 묻어나는 작품들로 일관했다는 점도  그의 인격을 어림하게 한다. 그는 시, 시조, 동시 모두를 아울렀고 특히 한민족의 애한적(哀恨的) 가락이 절절히 울려나는 시조에 능했다. 삼천 원이 없어 중학교에 진학하지 못하고 신문배달을 한 소년 박재삼. 딴은 삼천 원이 있었다면 박재삼은 시인이 되지 못했을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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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동네』 2017-1월호 <문학사의 풍경>에서

  * 정철훈/ 1997년 『창작과비평』으로 등단, 시집『뻬쩨르부르그로 가는 마지막 열차』『빛나는 단도』 외 다수의 시집과 장편소설, 산문집이 있음. 시인, 소설가, 문학저널리스트, 국민일보 논설위원·문화부장·문학전문기자 역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