깃발
유치환(1908~1967, 59세)
이것은 소리 없는 아우성
저 푸른 해원(海原)을 향하여 흔드는
영원한 노스탈쟈의 손수건
순정은 물결같이 바람에 나부끼고
오로지 맑고 곧은 이념의 푯대 끝에
애수는 백로처럼 날개를 펴다.
아! 누구던가
이렇게 슬프고도 애달픈 마음을
맨 처음 공종에 달 줄을 안 그는,
-전문-
▶ 예언자 없는 시대의 시(발췌)_ 장석주
바닷가 높은 첨탑처럼 깃발이 나부낀다. 시인은 "맑고 곧은 이념의 푯대 끝"이라고 썼다. 그 깃발이 힘차게 나부낀다. 그 깃발을 바라보는 가슴을 적신 것은 "영원한 노스탈쟈"이고, "애수"다. 둘 다 무언가를 잃은 자의 슬픔을 지시하는 감정이다. 깃발은 "소리 없는 아우성"이고, "푸른 해원"을 향해 흔드는 "손수건"이다. 깃발의 펄럭임이 "소리 없는 아우성"이 된 것은 어떤 정념이나 신념이 행동화되지 못한 채 내면화에 머문 탓이다. 잃어버린 것, 우리 삶에서 멀어져간 것은 무엇인가? 영원한 노스탈쟈의 손수건, 날개를 펴는 백로 같은 이미지들은 실재가 없다. 다만 그 실재 없는 것에서 우리는 잃어버린 이데아, 영원, 낙원, 꿈 따위를 상상할 수 있을 뿐이다. 잃어버린 것들이 지닌 찬연한 광휘에 반해 얻은 것은 삭막하고 고달프고 권태로 찌든 것이다. "깃발"은 동경의 대상과 조악한 현실 사이에서 펄럭이며 가 닿을 수 없는 것, 손에 거머쥘 수 없는 그 아득한 것을 향한 노스탈쟈와 애수를 앓는다. 그런 까닭에 "깃발"은 공중에 단 "이렇게 슬프고도 애달픈 마음"이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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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와표현』2017-1월호 <권두시론>에서
* 장석주 / 1975년『월간문학』으로 등단, 1979년《조선일보》신춘문예로 등단, 시집『몽해항로』외. 평론집『시적 순간』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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