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고 시인의 시

이성혁_1990년대 시에 나타난 세기말적인 상상력(발췌)/ 오래된 서적 : 기형도

검지 정숙자 2016. 12. 12. 17:06

 

 

    오래된 書籍

 

    기형도(1960-1989, 29세)

 

 

  내가 살아온 것은 거의

  기적적이었다

  오랫동안 나는 곰팡이 피어

  나는 어둡고 축축한 세계에서

  아무도 들여다보지 않는 질서

 

  속에서, 텅 빈 희망 속에서

  어찌 스스로의 일생을 예언할 수 있겠는가

  다른 사람들은 분주히

  몇몇 안 되는 내용을 가지고 서로의 기능을

  넘겨보며 書標를 꽂기도 한다

  또 어떤 이는 너무 쉽게 살았다고

  말한다. 좀더 두꺼운 추억이 필요하다는

 

  사실, 완전을 위해서라면 두께가

  문제겠는가? 나는 여러 번 장소를 옮기며 살았지만

  죽음은 생각도 못했다, 나의 경력은

  출생뿐이었으므로, 왜냐하면

  두려움이 나의 속성이며

  미래가 나의 과거이므로

  나는 존재하는 것, 그러므로

  용기란 얼마나 무책임한 것인가, 보라

 

  나를

  한번이라도 본 사람은 모두

  나를 떠나갔다, 나의 영혼은

  검은 페이지가 대부분이다, 그러니 누가 나를

  펼쳐볼 것인가, 하지만 그 경우

  그들은 거짓을 논할 자격이 없다

  거짓과 참됨은 모두 하나의 목적을

  꿈꾸어야 한다, 단

  한 줄일 수도 있다

 

  나는 기적을 믿지 않는다

      -전문-

 

 

   ▶ 1990년대 시에 나타난 세기말적인 상상력(발췌) _ 이성혁

  여기에서 독자들은 도저한 비관주의를 보게 될 것이다. 그리고 기형도의 실제 죽음을 상기하기도 할 것이다. 기형도의 죽음이 마치 자살처럼 느껴지는 것은 이 때문이다. 그래서 기형도가 삶의 밝은 면을 보여주지 않고 우리를 절망에 빠지게 한다고 그를 힐책하는 사람도 생기게 된다. 물론 기형도의 비극적 죽음을 아타까워하며 그의 시를 더욱 사랑하는 이들도 많아진다. 그런데 그 "검은 페이지"는 기형도뿐만 아니라 바로 우리 내면 깊숙한 곳에도 있다는 것이 이 시가 전해주는 의미의 핵심이다. '나'에 대해 진술하다가 갑자기 '그들'에 대해 단호하게 말하고 있는 것을 보면, 위의 시가 '나'에 대한 단순한 넋두리가 아님은 분명하다. 시인이 말하고 싶은 바는 검은 진실이 있다는 것이고, 그 진실을 끄집어내기 위해선 문학이란 '거짓'이 필요할 수도 있다는 것이다. "거짓과 참됨은 모두 하나의 목적을 / 꿈꾸어야 한다"는 단호한 진술이 이를 뒷받침한다. 그 "하나의 목적"이란 어떤 진실이라고 생각된다. 우리의 내면이 검다면, 검다는 진실을 시인은 말해야 한다는 것. / 검은 진실을 말하면서 자신의 영혼도 검어지는 것, 자신의 죽음에 이르기까지 이를 밀고 나간 시인이 기형도이다. 이 세기말적 영혼은 1990년대의 세기말적 분위기와 감성과 어울려 많은 독자의 사랑을 받았다. / 그리고 기형도 시의 영향 때문이라고 할 수는 없으나, 1990년대의 적지 않은 시인들은 기형도가 걸어간 길을 걸어 나갔다. 그러나 그 길은 단순히 허무로 빠지는 길이 아니다. 기형도가 검은 진실을 찾기 위해서 그 죽음과 대면하기 위한 길을 걸어 나갔듯이, 다른 세기말의 시인들 역시 죽음을 포착하고 이를 시에 표현하는 작업은 죽음에 함몰되는 것이 아니라 죽음을 통과하여 무엇인가를 붙잡기 위해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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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와표현』 2016-12월호 <기획 특집|쓰고 싶은 평론>' 에서

  * 이성혁/ 2003년 《대한매일신문》신춘문예로 평론 부문 당선, 저서『불꽃과 트임』『모더니티에 대항하는 역린』 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