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聖), 토요일의 밤과 낮
조오현
오늘은 등락의 폭이 큰 주가도
산그늘로 더금도금 길어져서 아픔을 덮어갔다.
빗살 완자창 멀리 보이는 빙경(氷鏡)도
남의 집에 달포나 삐대고 있는
나를 받아들이고 있는데
저 나무는 뭐가 못마땅해서 잔뜩 뼈물고 있나
설악산 노염 같은 눈사태
오늘은 성 토요일
거룩한 이가 무덤 속에 머물러 있음을 기억하는 날
-전문-
▶ 이렇게 읽었다 _ 이만식(시인, 가천대 영문과 교수)
서구사상에서 무(無), 즉 '있는 그대로의 어둠'은 사고가 불가능한 개념이다. 왜냐하면 서구식 사유방식 자체의 포기를 의미하기 때문이다. 불교의 측면에서 인식의 궁극적 목표가 되는 무(無)가 서구의 사상체계에서는 사유 자체를 시작할 수도 없는 개념인 것이다. 그러므로 기독교적 종교를 '포월'하려는 데리다의 새로운 종교 양상을 위한 '의식의 발전단계' 모색은 서구의 사상체계에서는 시작조차 하기 어려운 과업이다. 예를 들어, 'Human nature'는 서구적인 의미에서 "마음속에 깊이 뿌리를 내리고 있는 근간 또는 원칙의 용어"인데, 그것의 동양적 번역어인 '인간의 본성(本性)'에서 성(性)은 "존재의 일종이 아니라 첫 번째로 그리고 맨 먼저 하나의 행위이며 하나의 제작이다. 성(性)은 선천적이거나 선험적인 것이 아니다. 요컨대 동양사상의 경우에는 사물의 확실성이라는 개념체계가 확립되어 있지 않았기 때문에, 무(無)를 받아들이는데 큰 어려움이 없었다. 이런 측면에서 조오현의 '허망하고 쓸데없는 언어의 그물질', 즉 불립문자의 화두참구가 서구의 사상체계에서는 한없이 새로운 의식의 발전단계라고 여겨질 수 있다. 따라서 <성(聖), 토요일의 밤과 낮>에서처럼 조오현 그리고 불교계는 예수를 성자로 받아들이는 데 어려움이 없다.
예수가 십자가에 못 박힌 게 금요일이고, 무덤에서 3일 만에 부활한 날이 일요일이니, 토요일에는 예수가 무덤 속에 머물러 있었다. 토요일은 초월적인 존재의 죽음, 즉 무(無)의 기념일이다. 전통적인 유대교-기독교-이슬람교의 결합체에서는 사유체계의 결함으로 인해 기념할 수 없는 날이다. 그러므로 성 토요일의 예수는 불교에서 기억해 주어야 할 것이다. 이런 식으로 '의식의 발달단계'에 전문적인 노하우(know-how)를 갖고 있는 불교의 사상전통에 기대어, 한국의 기독교가 믿음의 심화과정을 모색하면서 세계적으로 기여할 수 있을 것이다.
지금까지 검토하여 온 바와 같이 기독교, 즉 서구사상의 측면에서는 종교 간 대화를 통한 반성작업이 상당히 진행 중이다. 그렇다면 불교, 즉 동양사상의 측면에서 종교 간 대화를 통한 반성작업이 어느 정도 진행 중인지 질문해야 할 것이다. 데리다의 '포월'의 방식에 의한 종교 역사관에 의거하면, 앞선 시대의 종교적 양상을 얼마만큼 얼마만큼 통 크게 포함하면서 초월해 나가는 지 여부에 그 종교의 미래 전망이 달려 있다고 볼 수 있다. 따라서 불교의 반성작업은 아주 중요하다. 이는 한국 불교계의 미래의 전망에 기여하는 조오현의 유산을 유의미하게 받아들이고 전개하는 작업이 될 것이다. ▩
※ 출처:『만해축전』「조오현의 문학사적 의의」에서 발췌 2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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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권성훈 편저_설악 무산, 한글 禪詩『이 · 렇 · 게 · 읽 · 었 · 다』/ 2015.3.12. 초판, 2016.5.10. 증보판 <도서출판 반디>발행
* 조오현(필명)/ 법명:무산(霧山), 법호:설악(雪嶽), 자호: 만악(萬嶽), 대충(大蟲)
* 편저자 권성훈/ 한신대학교 종교학과, 경기대학교 대학원 국문학과에서 「한국현대시에 나타난 치유성 연구」로 박사학위 취득, 고려대학교 국문과에서 「한국 종교시에 나타난 치유성 연구」로 박사후과정을 수료했다. 계간 『작가세계』신인상 수상, 시집 『유씨 목공소』, 저서『시치료의 이론과 실제』『폭력적 타자와 분열하는 주체들』『정신분석 시인의 얼굴』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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