잡지에서 읽은 시

비닐봉지의 외출/ 조남희

검지 정숙자 2016. 12. 29. 14:33

 

 

    비닐봉지의 외출

 

    조남희

 

 

  비닐봉지가 걸어간다. 텅 빈 비닐봉지가.

  어디로 가는 것일까. 휘청거리는 꼴이

  어젯밤 거나하게 몇 잔 한 것이 분명하다.

  무채색 바탕에 하얀 혈맥들 사이로

  시꺼먼 혈맥이 몇 가닥 뒤섞여 있다.

  한바탕 판을 벌린 흔적이다.

  밤새 도원결의라도 한 것일까!

  씨줄과 날줄로 뒤엉켜 끈끈한 냄새 가득하다.

  톡 건드리면 금방이라도

  뜨거운 액체가 떨어져 내릴 것만 같다.

  흐느적거린다. 새벽공기를 들이킨다.

  부풀려진 비닐봉지 어느 새 바람이 된다.

  나뭇가지에 앉은 비닐봉지, 행인들을 바라본다.

  말쑥한 차림에 꽉 조인 코르셋을 입고 있는지

  움직임이 하나같이 민첩하다.

  블랙혹 속으로 들어가기 위해 그들은

  행진을 한다. 앞으로, 앞으로!

  구령을 붙이지 않아도 한결같다.

  오직 누가 먼저 블랙홀을 차지할 것인지

  꼬리를 잡기 위한 행진이 계속된다.

  바람이 물렁해진다. 하얀 비닐봉지,

  살그머니 내려앉는다. 행인들 사이로,

  블랙홀을 향한 행렬 사이로.

  하얀 비닐봉지에 척하니 붙어 있던

  시커먼 혈맥들 서서히 떨어져 나간다.

     -전문-

 

   ※ 심사 : 시와사람 편집위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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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와사람』 2016-겨울호 <시와사람 신인상 당선작>에서

  * 조남희/ 전남 강진 출생, 광주대학교 문예창작학과 석사과정 수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