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단식 논의 수력학
이병일
빗줄기를 써레질하는 논물 속의 하늘이 찢어진다
사방이 깨진 물거울이다
파랗게 혹은 흙탕으로 부서진 물의 초침들도 있다
땅을 딛지 않는 바람새에게
공중에 떠서 잠드는 법을 가르치는 미루나무 그림자가
깊게 내려와 있다 흔들리는 물결과 함께 바람을 잘 탄다
그때마다 더운 공기들이 진흙에서 퐁퐁 올라오고
물은 미라가 될 수 없으니까 자꾸 아래로만 흘러간다
흐르는 사람들과 함께 나날이 엷어지기도 했다
그러나 아름다운 계단식 논의 水力學 속에서
물수제비 비행으로 두근두근 날아가는 잠자리와
물갈퀴도 울음주머니도 퉁퉁 불어있는 개구리가 쏟아진다
흙 묻은 발이 저리지만
계단식 논이야말로 비를 모시는 신전이고
물의 법만이 있다고 믿는 사람들
정작 흙과 하늘과 나무는 수맥에 숨어있지만
아무도 모른다
영원히 죽지 않는 시계,
계단식 논은 시방 시끄러운 물로 가득 차 있으니
물꼬가 터질 때
온갖 것들은 몸을 더듬는 물빛이고 물소리로 흐른다
-전문-
▶ 빛이라는 신앙에 관하여(발췌) _ 이병철
빛과 물질에 대한 이병일의 믿음은 "사방이 깨진 물거울"로 가득한 '계단식 논'으로 향한다. '계단식 논의 수력학'에 와서 빛은 물상을 현현하게 하는 이미지적 작용이 아닌 "자꾸 아래로만 흘러가는" 중력 작용이 된다. 상대성이론에 따르면 빛은 중력에 의해 휘어진다. 이병일은 빛을 잡아당겨 휘어지게 만드는 중력에 주목해 "영원히 죽지 않는 시계"라고 표현한 우주적 시간에 대해 이야기한다.
"논물 속의 하늘이 찢어지"고, "부서진 물의 초침들"이 빛나는 계단식 논은 "미루나무 그림자'와 "물수제비 비행으로 두근두근 날아가는 잠자리", "물갈퀴도 울음주머니도 통통 불어있는 개구리", "흙과 하늘과 나무"등 "온갖 것들"이 물소리로 흐르는 작은 우주다. 이병일은 계단식 논을 생명들이 공생하는 유기체적 우주로 해석하고 있다. 이 유기체의 세계는 수력학이라는 일정한 질서에 의해 유지된다. 이 수력학을 가능하게 하는 것은 물이 아래로 흐르는 성질, 즉 중력이다. 중력은 빛과 마찬가지로 만물에게 공통으로 작용한다. 수력학에 속한 생물들은 서로 공생하며 조화를 이룬다. 그 조화로움을 통해 계단식 논은 "영원히 죽지 않는 시계"를 획득한다. 이병일은 계단식 논을 현대인이 회복해야 할 삶터의 원형, 일종의 대안 우주(alternative universe)로 제시한다.
계단식 논은 진흙 웅덩이다. 진흙 웅덩이는 고여서 썩은 것처럼 보이나 실은 끊임없이 숨 쉬며 변화하는 유기농과 발효의 세계다. 진흙에는 죽음과 부패만 있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자양분 삼아 새로 태어나는 유기물과 미생물들이 발효와 부패를 거듭하는 조화로운 생태계다. 생명의 징후와 예감으로 우글거리는 태초의 대지이자 삶과 죽음이 상호작용하는 세계, 신생과 소멸의 반복이라는 리듬으로 화음을 이룬 하나의 우주다. 도시문명의 미친 속도로부터 멀리 떨어져 느린 삶을 영위할 수 있는 곳, 삶과 죽음이 살갑게 이웃하고, 인간과 자연이 조화를 이룬 곳, 나의 죽음마저 '진흙'의 질서로 편입되어 새로운 탄생을 예비하는 과정임을, 자연과 우주의 일부가 되는 통과의례임을 기꺼이 받아들일 수 있는 곳, 그곳이 바로 계단식 논이다.
계단식 논은 물질로서의 공간이지만 무형의 정신이 되기도 한다. 계단식 논의 내부에는 죽음을 포괄한 삶 자체를 위대하고 아름다운 것으로 여기는 태도, 자연의 질서가 내면화된 성숙한 세계 인식이 있다. 나를 비롯한 모든 생명이 '물의 법'에 속해 있음을, 우리 모두가 물로 '흐르는 사람들'임을 인정하는 것이다. 이 땅에서의 주어진 삶을 최선을 다 해 살고, 죽음의 외적 현상일 뿐인 부재와 소멸에 겁먹지 않는 의연함이 정신으로서의 계단식 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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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와사람』 2016-겨울호 <신작초대석>에서
* 이병일/ 2007년『문학수첩』으로 등단, 시집『옆구리의 발견』『아흔아홉 개의 빛을 가진』
* 이병철/ 2014년『시인수첩』으로 시, 2014년『작가세계』로 평론 등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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