잡지에서 읽은 시

권온_생생한 현장감과 내면의 열정(발췌)/ 라싸로 가는 바람 : 김제김영

검지 정숙자 2016. 12. 15. 14:39

 

 

    라싸로 가는 바람

 

    김제김영

 

 

  죽을 이유를

  수도 없이 만드는 바람

 

  바다의 첫걸음이 불쑥 미끄러진다

 

  기울어진 어깨를 들썩일 때마다

  해안으로 밀려 나오는 흰 뼈들

 

  슬쩍

  수평선을 넘어오는

  악수와 외면의 기억

 

  일부러 태엽을 푼 건 아니겠지

 

  바람이 젖는다

  상처가 새겨 넣는 문장

 

  <오히려 불신을 믿자>

 

  그리고, 나는 훨씬 멀리 갈 것이다

    -전문-

 

  ▶ 생생한 현장감과 내면의 열정(발췌) _ 권온

  의미 파악이 쉽지만은 않은 시이다. 실루엣 기법의 그림처럼 독자의 상상력을 자극하는 작품이 김제김영의 시 「라싸로 가는 바람」이다. 제목에 위치한 '라싸(Lasa)'는 중국 서남부에 있는 도시로서 7~14세기에는 토번(吐番)의 수도였으며 역대 달라이 라마의 궁전과 대사원이 있다. / '라싸로 가는 바람'은 어떤 바람일까. 시인은 1연에서 라싸로 가는 바람을 "죽을 이유를/ 수도 없이 만드는 바람"으로 해석한다. 고도(古都) 또는 구도(舊都)의 자취에서 죽음의 냄새를 맡는 일은 충분히 가능하다. '죽음'과 연결된 일련의 부정적인 표현에 주목할 수 있으니, '미끄러진다'거나 '기울어진' 같은 동사, '흰 뼈들'이나 '외면' '상처'나 '불신' 등의 명사가 구체적인 예이다. / 김제김영의 시 「모래 고래」에는 '문장들'이라는 단어가 있는데, 이번 시에도 '문장'이 출현한다. '상처가 새겨 넣는 문장'인 "오히려 불신을 믿자"는 시의 화자 '나'의 음성인 동시에 시인 김제김영의 목소리이다. '상처'나 '불신' 같은 어둠을 뚫는 문장의 힘을 역설하는 대목이다. "그리고, 나는 훨씬 멀리 갈 것이다"라는 이 시의 마무리는 독자의 가슴을 따뜻하게 데우는 단언이다. 폴 발레리가 말했듯이 우리는 불어오는 바람을 바라보며 삶의 의지를 불태워야 하는 것이다.   

 

    ----------------

  *『문학청춘』 2016-겨울호 <집중특집>에서

  * 김제김영/ 전북 김제 출생, 1996년 시집『눈감아서 환한 세상』으로 작품활동 시작, 시집 『다시 길눈 뜨다』『나비편지』, 수필집『뜬돌로 사는 일『잘가요, 어리광』외, 강의록『활동중심의 독서교육』, 어휘모음집『쥐코밥상』, 학습서『퍼즐로 만나는 시조세상』, 공저『즐거운 문학수업』, 전북시인상 · 전북여류문학상 등 수상

* 권온/ 1974년 서울 출생, 2008년 『문학과사회』로 등단

'잡지에서 읽은 시' 카테고리의 다른 글

우리의 죄는 야옹/ 길상호  (0) 2016.12.15
칼집/ 박해람  (0) 2016.12.15
모래 고래/ 김제김영  (0) 2016.12.15
안쪽/ 최석균  (0) 2016.12.15
바다 공동묘지/ 김명인  (0) 2016.12.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