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 제6회 <시와표현> 작품상_수상작
물의 학회(學會)
박해람
한 켤레의 물을 신고 걷는다.
자꾸 흘러내리는 물의 기장(機長)
물광내는 남자를 알고 있다. 수 천 겹의 물을 덧바른 남자의 손엔 까만 물
때가 끼어 있었다. 적란운(積亂雲)인듯 하지만 흑연(黑鉛)이 낀 손톱이 열
개. 아침마다 짐승 하나가 송곳니로 빠져나가면 입속을 헹궈내던 물. 남자
가 물로 닦아온 것들은 다름 아닌 짐승들의 발, 한 켤레의 구두가 번식시키
던 질긴 노동.
물을 덩어리라고 인정하지 않는 학회(學會)의 간사를 지낸 남자를 알고 있
다. 그의 말에 의하면 물의 뼈는 쉬지 않고 졸졸 소리를 낸다고 했다. 돌 속
에서 성호를 그은 물의 종류 중에는 나무빨래판이 있다고도 했다. 또 물을
세공해 파는 남자도 알고 있었는데 물은 와장창 소리가 없어 절대 깨지지 않
는다고 했다. 바닥에 흘려도 쓸어 담을 빗자루가 개발되지 않았으므로 파편
이 되지 못한다고도 했다. 또 어릴 때 물을 동생으로 둔 친구는 틈나는 대로
물을 업어주었는데 가끔 따뜻한 물이 등을 적셨다고 했다. 물이 울고 물을 달
래다 짜증을 내면 친구의 엄마는 물 흐르는 대로 살아라, 했다고 한다. 어느
날은 하류에 모여 살던 신발들을 찾으러 간 친구는 발목을 삼킨 물에게서 평
생 허우적거리는 법을 배워왔다고 했다.
가끔 그런 생각은 안하나? 누구에게도 허락받지 않는 물은 물물교환하듯
지구의 곳곳을 섞어놓고 한 모금으로도 사막과 대항할 수 있고 모래들의 주
인이며 지구의 제곱미터들의 합산이기도하며 모든 돛들의 정박지이기도 한
물은 미시시피와 황하의 그 길고 긴 거리로 지구를 둘둘 감고 있다는 생각
같은 것 말이다.
물을 세공하는 남자와 물광내는 남자와 아가미가 달린 구두를 신고 뻐끔뻐
끔 걸어가는 남자는 같은 이름을 하고 선미(船尾)라는 이름의 한 여자를 사
랑했던 내 친구인데 훌쩍훌쩍 울고 있는 물의 등을 쓰다듬어주며 물엔 매운
맛과 뜨거운 온도가 들어있고 단맛과 신맛이 들어있지만 맵고 뜨겁고 또 달
고 신맛은 그날그날의 표정일 뿐이라고, 꼼지락거리고 비늘이 돋는 열 개의
발가락을 신겨주고 가는 것이다.
밀물을 접안시키는 도선사(導船士) 공부를 해야겠다.
-전문-
▶ 물의 시학詩學론(발췌) _ 이병철
구두에서 출발해 지구까지, 하나의 물질에서 시작해 포스트모던 세계상으로까지 웅대한 스케일의 이미지 변주와 사유 이동을 거친 '물의 시학'은, 다시 "선미(船尾)라는 이름의 한 여자를 사랑했던 내 친구"와 "그날그날의 표정"과 "비늘이 돋는 열 개의 발가락"이 있는 구체적 삶의 체험으로 회귀한다. 여자 이름 선미가 '배의 꼬리'인 점이 재미있다. 물과 배는 뗄 수 없는 관계다. 물은 배를 띄워 움직이기도 하지만, 뒤집어 버리기도 하고, 제 힘으로 육지에 닿게 해 다시 만날 수 없게도 한다. 남녀의 연정을 물과 배로 비유한 것은 탁월한 에스프리다. 박해람은 물을 "그날그날의 표정"으로 호명하며 한순간도 물과 무관하게 살아온 적 없는, 살아갈 수 없는 인간 존재의 보편 양식을 다시금 되새긴다.
"밀물을 접안시키는 도선사 공부를 해야겠다"는 선언이야말로 '물의 시학'의 출사표라 할 만하다. 물의 유연함, 부드러움, 비경계성, 비구분성, 유속성, 영속성, 유동성, 파괴성, 창조적 에너지를 내면에 접안(接岸)시켜 시의 패러다임으로 삼겠다는 전향적 자각! 박해람의 시는 이미 이루었으나 이루지 못하였으므로 세계 곳곳을 물처럼 흘러 새로운 변화를 끝없이 모색하려 한다. 그 시력(詩歷)의 변곡점에서, 소용돌이치는 차고 맑은 물빛에 흠뻑 젖을 수 있었던 점 큰 기쁨이다.
※ 심사위원: 김종태, 이성혁, 권현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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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와표현』 2016-12월호/ '제6회 <시와표현> 작품상_수상작' 에서
* 박해람/ 1998년 『문학사상』으로 등단, 시집『낡은 침대의 배후가 되어가는 사내』『백 리를 기다리는 말』외.
* 이병철/ 2014년 『시인수첩』시, 2014년 『작가세계』로 평론 등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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