벌판에서
오정국
1
폭우 속으로 뛰어들었고, 거기서
누군가의 이름을 불렀고
견딜 수 없었고
용서할 수 없었다
그게 사랑인 줄 모르고
폭풍우 지나간 뒤
벌판의 해바라기를 바라보았다
2
더 아프게 몸 눕혀서 생각해야 핬던
이번 생, 살 허물을 걷어내고
뼈의 말로 적어야 했던
사랑이며 기쁨이며 서러움 같은 게 있었다
천둥번개 지나간
벌판에 서면
찰나의 아름다움이
세상을 바꾼다고 믿었던 믿음들이
낙뢰 맞은 나뭇가지처럼 시커멓게 그을려 있다
이럴 줄 몰랐던, 더 아프게 몸 눕혀서
팔을 뻗어야 했던, 몸 바쳐서
몸 비벼서 맞잡아야 했던
이번 생의 사랑과
그 놀라운 기쁨과
그다음의 서러움 같은 것들
붉은 흙구덩이에 버무려져 있었다
3
해바라기는 그쯤에서 무정부주의가 되었다
구름은 구름끼리 벌퍈을 흘러가고
이번 여름 건너가기
이토록 힘겨운데
해바라기는
자존의 중심을 공중으로 세워서
잎을 버리고 꽃을 버리고
거기 그 자리에서 내려앉았다
-전문-
시인론> 해바라기의 거소居所(부분) _ 최종환
전날 우리가 붙들었던 건 해바라기의 각본이었을지 모른다. 희망의 각본이 흔히 그렇듯 우리가 사랑했던 것은 그 희망의 시나리오였던 것이다. 그렇다면 사랑은 다른 각본 위에 쓰일 수도 있다. 그것이 그 시절 해바라기의 얼굴 안에만 있으라는 법은 없다. 지난날의 각본들이 실패한 곳에서도 해바라기는 일어난다. 거기서도 노래로 일어나는 태양이 있을 것이다. 태양은 "폭풍우 지나간 뒤" 벌판에 쓰러져 누운 자존과 고독, 그리고 혁명을 꿈꾼 낱말들이 통곡처럼 서 있는 자리, 그곳으로 오정국 시인이 조심스레 걸어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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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로여는세상』 2016-겨울호 <조명/신작시>에서
* 오정국/ 1956년 경북 영양 출생, 1980년《매일신문》신춘문예 단편소설 당선, 1988년 『현대문학』으로 시 등단, 시집 『저녁이면 블랙홀 속으로』『파묻힌 얼굴』외, 시비평집『시의 탄생, 설화의 탄생』, 평론집 『비극적 서사의 서정적 풍경』, 시론집 『현대시 창작시론 : 보들레르에서 네루다까지』, 지훈문학상 · 이형기문학상 등 수상, 현재 한서대 인문사회학부 미디어문예창작학과 교수
* 최종환/ 문학평론가, 2015년 《문화일보》로 등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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