흘러내리는 벽
정채원
둥근 벽시계가 걸려 있는 벽은
아무도 모르게 한 눈금씩 등이 굽는다
꼬부랑 할머니가 TV를 본다
동물의 왕국에선
경쟁자를 물리친 수여우가 암여우에게 구애를 시작한다
한 번 짝을 짓고 나면
수컷은 끝까지 새끼와 어미를 보호한다네
수여우는 먹이를 찾아
눈 쌓인 숲을 헤매고 있네 어려운 계절이야
바닥이 조금씩 파이고
쭈글쭈글한 손으로 손주에게
밥을 떠먹이는 할머니
밥 속에는 잘게 부서진 돌멩이
잘게 부서진 못이 잡곡처럼 섞여 있다
아이가 달려가다 움푹 파인 바닥에
넘어진다 울음을 터뜨리고
아이는 한 뼘씩 자란다
벽은 한 뼘씩 흘러내리고
할머니도 줄줄 흘러내린다
수여우는 암여우에게 가져다 줄 들쥐를 잡기에 여념이 없고
할머니는 주어진 못을 다 삼킨 듯 눕는다, 벽에 걸린
시계가 끊임없이 바늘에 찔리면서도
둥근 얼굴을 펼치는 동안
암여우가 또 새끼를 낳는 동안
할머니는 파인 바닥으로 거의 다 스며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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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시』2016-10월호 <신작특집>에서
* 정채원/ 1996년『문학사상』으로 등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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