잡지에서 읽은 시

흘러내리는 벽/ 정채원

검지 정숙자 2016. 11. 4. 21:08

 

 

    흘러내리는 벽

 

    정채원

 

 

  둥근 벽시계가 걸려 있는 벽은

  아무도 모르게 한 눈금씩 등이 굽는다

  꼬부랑 할머니가 TV를 본다

  동물의 왕국에선

  경쟁자를 물리친 수여우가 암여우에게 구애를 시작한다

  한 번 짝을 짓고 나면

  수컷은 끝까지 새끼와 어미를 보호한다네

  수여우는 먹이를 찾아

  눈 쌓인 숲을 헤매고 있네 어려운 계절이야

  바닥이 조금씩 파이고

  쭈글쭈글한 손으로 손주에게

  밥을 떠먹이는 할머니

  밥 속에는 잘게 부서진 돌멩이

  잘게 부서진 못이 잡곡처럼 섞여 있다

  아이가 달려가다 움푹 파인 바닥에

  넘어진다 울음을 터뜨리고

  아이는 한 뼘씩 자란다

  벽은 한 뼘씩 흘러내리고

  할머니도 줄줄 흘러내린다

  수여우는 암여우에게 가져다 줄 들쥐를 잡기에 여념이 없고

  할머니는 주어진 못을 다 삼킨 듯 눕는다, 벽에 걸린

  시계가 끊임없이 바늘에 찔리면서도

  둥근 얼굴을 펼치는 동안

  암여우가 또 새끼를 낳는 동안

  할머니는 파인 바닥으로 거의 다 스며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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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현대시』2016-10월호 <신작특집>에서

   * 정채원/ 1996년『문학사상』으로 등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