잡지에서 읽은 시

측량/ 안희연

검지 정숙자 2016. 10. 28. 20:16

 

 

    측량

 

    안희연

 

 

  수신인을 알 수 없는 상자가 배달되었다

 

  상자를 열어보려고 하자 그는 만류했다 열어본다는 것은

책임지겠다는 뜻이라고

 

  우리는 상자를 앞에 두고 잠시 생각을 하기로 했다

 

  그때 상자가 움직였다 생명이라면 문제는 더 심각했다 누

군가에게 영원히 되돌아갈 집이 된다는 것은,

 

  원치 않는 방향으로 자라나는 이파리들을 날마다 햇빛

쪽으로 끌어다 놓는 스스로를 상상했다 기대하고 실망하

는 모든 일들이 저 작은 상자 안에서 이루어지고 있었다

 

  생각은 영혼을 갉아먹는 벌레 같았다 작고 하얀 벌레는

순식간에 불어나 온 마음을 점령했다 상자가 움직일 때마

다 우리의 하루도 조금씩 휘청거렸고

 

  고작 상자일뿐이었다면 쉽게 버렸을 것이다

 

  그런데 말이야, 잘못 배달되지 않은 사랑이 과연 있을까

더구나 생명이라면

 

  너는 상자 앞으로 성큼 다가섰다 나는 마른침을 꿀꺽 삼

켰다 물을 마시지만 물을 침범하지 않는 사랑을 알고 싶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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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현대시학 』2016-10월호 <신작시>에서

  * 안희연/ 2012『창작과비평』으로 등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