측량
안희연
수신인을 알 수 없는 상자가 배달되었다
상자를 열어보려고 하자 그는 만류했다 열어본다는 것은
책임지겠다는 뜻이라고
우리는 상자를 앞에 두고 잠시 생각을 하기로 했다
그때 상자가 움직였다 생명이라면 문제는 더 심각했다 누
군가에게 영원히 되돌아갈 집이 된다는 것은,
원치 않는 방향으로 자라나는 이파리들을 날마다 햇빛
쪽으로 끌어다 놓는 스스로를 상상했다 기대하고 실망하
는 모든 일들이 저 작은 상자 안에서 이루어지고 있었다
생각은 영혼을 갉아먹는 벌레 같았다 작고 하얀 벌레는
순식간에 불어나 온 마음을 점령했다 상자가 움직일 때마
다 우리의 하루도 조금씩 휘청거렸고
고작 상자일뿐이었다면 쉽게 버렸을 것이다
그런데 말이야, 잘못 배달되지 않은 사랑이 과연 있을까
더구나 생명이라면
너는 상자 앞으로 성큼 다가섰다 나는 마른침을 꿀꺽 삼
켰다 물을 마시지만 물을 침범하지 않는 사랑을 알고 싶었
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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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시학 』2016-10월호 <신작시>에서
* 안희연/ 2012년 『창작과비평』으로 등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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