잡지에서 읽은 시

권영민_시인 김남조의 '마지막 편지'(발췌)/ 정념의 기(旗) 외 편

검지 정숙자 2016. 11. 2. 15:20

 

 

    정념의 기(旗)

 

    김남조

 

 

  내 마음은 한 폭의 기

  보는 이 없는 시공에

  없는 것 모양 걸려왔더니라

 

  스스로의

  혼란과 열기를 이기지 못해

  눈 오는 네거리에 나서면

 

  눈길 위에

  연기처럼 덮여오는 편안한 그늘이여

  마음의 기는

  눈의 음악이나 듣고 있는가

 

  나에게 원이 있다면

  뉘우침 없는 일몰이

  고요히 꽃잎인 양 쌓여가는

  그 일이란다.

 

  황제의 항서와도 같은 무거운 비애가

  맑게 가라앉은

  하얀 모래벌 같은 바음씨의

  벗은 없을까

 

  내 마음은 

  한 폭의 기

 

  보는 이 없는 시공에서

  때로 울고

  때로 기도드린다 

    -전문-

 

시인 김남조의 '마지막 편지'(발췌) _ 권영민

앞의 시 「정념의 기(旗)」는 인간의 고뇌와 삶에 대한 욕망을 기구하는 자세로 노래하고 있는 김남조의 초기 시의 경향을 대표한다. 이 시에서 시인의 정서는 '내 마음은 한 폭의 기'라는 구절에 집약되고 있다. 여기서 '기'는 드높은 하늘을 향한 동경과 기도를 상징한다. 절대적인 신앙의 경지에서 이루어지는 간절한 기도가 이 속에 담겨 있다. 하지만 이러한 정신적 지향 자체의 의미를 제대로 알아보기란 쉽지 않다. 시 정신의 높이가 이미 삶의 현실을 초월해 있기 때문이다. 시적 화자가 '스스로의 / 혼란과 열기를 이기지 못해 / 눈 오는 네거리에 나서면' 그 비애의 정서를 함께 나눌 수 있는 사람이 아무도 없다. 그렇게 삶은 각박하고 현실은 거칠다. 여기서 시적 화자의 기도는 의외로 소박하다. 일상의 삶에 지친 사람들이 고요하게 하루를 마감할 수 있게 되기를 바라고 있을 뿐이기 때문이다. 이것은 '뉘우침 없는 일몰이 / 고요히 꽃잎인 양 쌓여가는 / 그 일'이라고 시공간을 구조화한 감각적 이미지로 표현되어 있다. 이 섬세한 언어로 형상화된 고도의 비유 속에는 평화로움과 안식을 구하는 시인의 소망이 숨겨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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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지막 편지

 

   김남조

 

 

  내 마지막 편지는

  못 보낸 봉서,

  사계절 몇 둘레가

  젖은 맨발로 이슬 털며 다녀가도

  아직 아니라

  흰 살결 먹물 문신

  옷 벗을 날 그 아니라

 

  실타래 길게 푸는

  바람과 햇빛 그리고

  사람들의 마음,

  처음 물꼬를 트는

  강물이

  붉은 흙탕물 갈아입고 갈아입어

  기어이 수정물빛 되듯이

  천만번뇌

  다 갚아주고 남는

  사람들의 사랑,

 

  그 하나의 사연을

  여기 담았으되

  아직 아니라, 아니라고

  봉함 속에

  옷깃 여미고 누웠느니

 

  아아 너무나 늙고

  영원히 젊은

  내 마지막 편지

    -전문-

 

  시인 김남조의 '마지막 편지'(발췌) _ 권영민

  김남조의 「마지막 편지」는 시인이 오랜 시작 생활을 통해 추구했던 시적 결정성의 미학이 무엇인가를 암시해 주고 있다. 여기서 '편지'는 시인의 상상력에 의해 그 의미의 폭과 깊이가 크게 확장되고 심화된다. '사계절 몇 둘레가 / 젖은 맨발로 이슬 털며 다녀가도'라는 진술은 봉해진 편지를 보내지 못한 채 여러 해가 바뀌고 있음을 우회적으로 표현하고 있으며, ;흰 살결 먹물 문신 / 옷 벗을 날'이라는 구절은 몸의 느낌 또는 몸의 상상력으로 이 편지의 의미를 암시하고 있다.

  이 시를 읽는 독자라면 누구나 '편지' 속에 담겨진 사연이 궁금하다. 봉해진 상태로 시인이 품속에 담겨져 있는 이 편지는 누구에게 쓴 것일까? 이 편지의 사연은 슬픔일까, 행복일까? 편지에 담긴 말들은 천상을 향한 기도일까, 삶의 현실에 던지는 원망일까? 시인의 가슴 속 깊은 순정의 의미를 고백하는 사랑일까, 스스로 자기 희생을 감추고 있는 고통과 눈물일까? 하지만 이런 거듭된 질문은 기실은 부질없는 일이다.

  이 시의 시적 화자는 봉해진 편지가 '사람들의 마음'과 '사람들의 사랑'을 하나의 사연으로 간직하고 있음을 고백한다. 그렇지만 여전히 아직은 편지를 부칠 때가 아니라고 주저한다. 그 이유는 그것이 '너무나 늙고 / 영원히 젊은 / 내 마지막 편지'이기 때문이다. 여기서 제시되는 '너무나 늙고' 영원히 젊은'이라는 두 개의 구절이 이 편지의 사연에 숨겨진 의미를 대신하지만, 이 특유의 모순어법이 만들어내는 시적 긴장을 떨쳐내기란 그리 쉽지 않다.

  이 시에서 시적 진술의 대상이 되고 있는 '편지'는 시인의 가슴에 간직하고 있는 사랑이지만 그것은 숨겨진 것은, 아니다. 시인을 찾는 모든 사람들에게 이미 깊숙하게 전달된 셈이다. 그러므로 「마지막 편지」의 참주제는 내면의 가치를 제대로 알아차릴 수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쉽게 찾아낼 수 있다. 시적 화자의 입을 통해 들려주는 '아아 너무나 늙고 / 영원히 젊은 / 내 마지막 편지' 라는 고백적인 진술 속에는 시인이 지난 70년 동안 외롭지만 아름답게 지켜낸 시 정신의 의미가 그대로 담겨져 있다. 이 '마지막 편지'를 개봉하고 그 사연에 가슴을 쳐야하는 것은 이제 독자들의 몫이다.

 

  * 이 글은 영인문학관에서 펼쳐지고 있는 특별전 '김남조 문학 70년'을 기리는 의미에서 마련한 몇 편의 시에 대한 작은 독후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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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문학사상 』2016-11월호 <김남조 문학 70년을 기리며>에서

  * 권영민/ 문학평론가, 단국대 석좌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