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 멀어지자
김경미(金慶美)
어느 날 버스를 타고 가다가 갑자기 눈물이 솟았다
내 영혼 얼마나 상했는지
이럴려던 게 아니었는데
밤의 빗소리도 자운영 꽃밭도 설탕냄새 나는 눈물이며 유리창들
기차 같던 손목과 포옹들도 잊은 지 오래다
귀가하니 몇 년 만에 편지가 와있다
원망과 악담이 가득한 편지
다들 뒤에서 혀 내두르는 이를 가까이했던 죄가 아니라
본인만 본인의 허물을 모르는 건
그녀와 나와 온 지구의 허물
반성하므로 그녀와 나는 각자 고독해야하며
고독의 역사라는 제목의 책이 있는지를 나는 확인하겠으며
없으면 나라도 머잖아 쓰겠으며
쓰기 전에 몇 겹이고 더 고독하겠으며
가족이나 친구가 없는 건 잘못 산 것이란 단정에
화를 냈던 것
저녁 해 지는 길 위에서 낮의 일들을 후회하는 것과
낙엽이 되어서야 멀리 걸어가는 나뭇잎
무릎 꿇고서야 투명해지는 진실
바람에 쓰러진 떠들썩한 간판
해치고 헤치며 상한 영혼
모두를 한 상자에 담아 조건 없이 반성하겠으나
너와 나는 부디 이대로 더 멀어져 더 쓸쓸해지자
입과 귀가 다르게 달린
서로가 별빛처럼 보일 때까지.
-전문-
▼
시작노트 _ 부디 더 멀어지자
---------------
*『문학사상』2016-10월호 <시>에서
* 김경미(金慶美)/ 1959년생, 1993년《중앙일보》신춘문예로 등단, 시집 『밤의 입국심사』. 지혜서『그 한마디에 물들다』
'잡지에서 읽은 시' 카테고리의 다른 글
| 박남희_현실과 환상이 퍼 올린 불꽃의 춤(발췌)/ 테셀레이션 : 강인한 (0) | 2016.10.13 |
|---|---|
| 유성호_보이지 않는 것들의 위의威儀(발췌)/ 구경꾼-사막 1 : 이경 (0) | 2016.10.10 |
| 생흔(生痕)*/ 김종연 (0) | 2016.10.09 |
| 갈대/ 신경림 (0) | 2016.10.09 |
| 치약 튜브의 구멍이 작아지지 않은 이유에 대하여/ 윤희상 (0) | 2016.10.08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