맹인의 아침
이원규
산촌 하내리의 겨울밤
자정 넘어 함박눈 내리면
먼저 아는 이 누구일까
제아무리 도둑발로 와도
먼저 듣고 아는 이 누구일까
온 마을 길들이 덮여
문득 봉당 아래 까무러치면
맹인 김 씨 홀로 깨어 싸리비를 챙긴다
폭설의 삶일지라도 살아온 만큼은 길 아니던가
밤새 쓸고 또 쓸다 보면
맹인 김 씨 하얀 입김 따라 열리는 동구 밖
비록 먼눈일지언정
깜박이는 눈썹 사이 하내리의 아침이 깃들면
맨 먼저 그 길을 따라
막일 나가는 천 씨의 콧노래
등교하는 아이들의 자전거 페달 밟는 소리
비로소 맹인 김 씨 잠을 청한다
-전문-
▶ 비보(飛步), 걷는 것보다 더 빠른 것은 없다
분기탱천 청년기에는 축지법을 꿈꾸었다. 한달음에 일초직입의 세계에 도달할 수도 있을 것이라 믿었다.
하지만 돌이켜 생각해보니 미몽이었다. 오래 걷고 또 걷다가 돌아보니 생각보다 멀리 와 있었다. 마치 날아온 듯이 걸어온 비보(飛步)였다. 축지법은 한자리에서 꿈만 꾸는 것이 아니라 맹인 김 씨처럼 한 발 한 발 집중하며 내딛는 것, 왼발 딛고 오른발 드는 그 한 걸음이 모여 겨우 이루어지는 것이었다. 언제나 들숨 날숨을 쉬듯이 끝없는 동어반복의 발걸음이 바로 축지법의 핵심이었다.
지리산에 들어온 지 어느새 19년이 되었다. 그동안 뭔가 한 게 있다면 그것은 단지 많이 걷고 많이 달리는 것이었다. 한반도 남쪽 곳곳을 줄잡아 3만 리 길을 걸으며 세상사 안부를 묻고, 또한 모터사이클을 타고 110만 킬로미터 이상을 달리며 세상사 두두물물에게 눈인사라도 했으니 거리상으로 지구 25바퀴 이상을 돈 셈이다. 마침내 국도와 지방도 어디든 안 가본 곳이 없는 '인간 내비게이션' 수준이 되었다.
날마다 이곳저곳 걷거나 혹은 달리면서 속도와 반속도의 경계를 넘나들고, 비 오면 비 맞고 바람 불면 바람의 정면으로 달리거나 혹은 측면의 바람에 온몸을 기대었다. 어쩌면 시를 쓰는 일과 다르지 않았다.
다만 가더라도 머리가 먼저 가면 교만이라는 지식의 올가미에 걸리기 쉽고, 또 가슴이 먼저 가면 격한 싸움 뒤의 우울증에 빠지기 쉽다. 가더라도 먼저 발이 가고 온몸이 가도 머리와 가슴이 뒤따라가야 하는 게 아닌가. 모르긴 해도 아마 행선(行禪)의 원리 또한 이와 다르지 않을 것이다.
날마다 겨드랑이가 아닌 발바닥이 간질간질 가려웠다. 그동안 108마력의 슬픔으로 이 세상을 걸어서 왔다. 볼 것 안 볼 것 다 보았으니, 이제 남은 일은 내가 걷고 달려온 길 위에 쭈그려 앉은 나의 시들에게 좀 더 다정하면서도 날카로운 악수를 건네는 것이다.
온몸이 한 자루 붓이 되어 지리산에 그 둘레가 850리인 동그라미 하나 그리고, 1년 동안 단 한 글자밖에 쓰지 못한다 한들 어찌하겠는가. 매일 가는 길도 이렇게 처음 가는 길이라면 날마다 꽃길이 아닐 수 없다. 가다가 돌아보면 어느새 지나온 길이 아득하고, 사람의 걸음걸이가 마치 날아온 것처럼 엄청난 속도의 비보였다는 것을 절감했다. 탐진치에 걸려 나자빠지지 않는 무애의 길 위에 서면 발바닥이 곧 날개요, 한 자루 필생의 붓이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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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에티카』 2016-하반기호 <시에티카 시로 여는 에세이>에서
* 이원규/ 1984년 『월간문학』, 1989년『실천문학』으로 등단, 시집『강물도 목이 마르다』『돌아보면 그가 있다』등. 산문집 『지리산 편지』『멀리 나는 새는 집이 따로 없다』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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