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세이 한 편

「묘생」고양이 세계 속에 살기/ 이용한

검지 정숙자 2016. 9. 16. 22:24

 

 

    묘생

                

    이용한

 

 

  고양이는 깊다, 라고 써야 하는 밤은 온다

 

  짐승에겐 연민이 없으므로 때때로 서쪽에서 부는 한 마리의 방랑을

약하게 읽어본다 언제나 옳다는 고양이의 진리는 이미 무지개다리를

건넜다 나에게 남은 건 등이 휜 저녁과 길게 우는 일요일이다 골목에

적힌 소변금지가 대변하는 것은 변변한 분별력이다 이를테면 너의 심

층을 걸어 내려가는 계단에 앉아 짧은 수염을 덧붙이는 것, 모든 고양

이의 세습이 고독한 영역을 관장하지는 않는다 다만 그것을 묘생이라

불러도 좋다 지붕이 있든 없든 상관없다 배경은 배후로써만 안락하다

어떤 역할은 파랗게 녹슬어서 늙은 고양이처럼 가르랑거린다 단지 잊

기 위해 너는 꼬리를 쓰다듬는다 거참 묘한 일이다 상처가 깊을수록

아프지 않다는 건, 바퀴에 뭉개진 발자국을 바람에 부쳐본들 비명은

점점 창과 구름 사이에서 악화될 것이다

 

  문득, 고양이별에는 분노가 없다고 지저귀는 겨울이다

     -전문-

 

 

   고양이 세계 속에 살기

 

  - "만약 인간을 고양이와 교미시킨다면 인간은 더욱 개선되겠지만 고양이는 더욱 악회될 것이다." - 마크 트웨인 

 

  고양이가 존재하는 이유는 우리가 존재하는 이유와 다르지 않다. 우리가 인생을 살듯 고양이도 묘생(描生)을 산다. 그들도 우리처럼 심장이 뜨거운 똑같은 생명체이며, 우리가 느끼는 기쁨과 절망과 고통을 동등하게 느끼고 있다.그러나 모든 묘생은 모든 인생보다 훨씬 기구하고 박복하다. 단지 고양이로 태어났다는 이유만으로 그것은 세습되고 악화된다. 바로 지금 한국이라는 시공간에서 그들의 불편부당한 현실은 엄연하다. 내가 아무도 관심을 두지 않는 묘생에 주목하는 까닭도 그 때문이다. 천대와 멸시가 당연한 현실. 아무렇지 않게 인생이 묘생을 파탄 내는 현실.

  사실 고양이는 인간의 가장 가까운 곳에 존재하지만, 인간이 가장 멀리하는 존재나 다름없다. 소외 속에서 살아가는 그들의 묘생에서 나는 종종 버림받고 가라앉은 밑바닥 인생을 목도한다. 언제나 쫓기고 도망치기 바쁜 삶. 내 흐릿한 눈 속에서 쓰레기통을 뒤지는 고양이와 파지를 줍는 노인이 교차하고, 지붕 없는 노숙자와 처마 밑의 고양이가 점멸한다. 누군가는 잊기 위해 꼬리를 쓰다듬고, 누군가는 하염없이 뭉개진 발자국을 핥는다. 누군가는 등이 휜 저녁을 끌고 타박타박 집으로 돌아간다. 그 '누군가'가 고양이든 사람이든 관계없다. 저 깊은 바닥에서는 어차피 인생도  묘생도 무상하니까.

 

  한 마리의 방랑.

  한 마리의 슬픔.

 

  아는 사람은 알고 모르는 사람은 굳이 알 필요 없지만, 나는 시인보다 여행가로, 여행보다 고양이 작가로 더 알려져 있다. 말하자면 고양이 책을 시집보다 더 많이 썼다. 시집보다 고양이 책이 훨씬 많이 팔렸다. 내가 고양이 세계에 발을 들여놓은 건 그리 오래 되지 않았다. 9년 전이었을 거다. 달밤이었고, 우연히 집 앞의 은갈색 소파에 다섯 마리 아기고양이가 어미 품을 파고드는 장면을 목격한 뒤로 내 머릿속에선 이따금 고양이가 오종종 앉아있곤 했다. 고양이와의 인연은 그렇게 시작되었다. 달빛과 소파와 여섯 마리의 고양이와 함께. 그것은 잠자고 있던 측은지심을 기어이 건드렸고, 어느새 나는 고양이에게 먹을 것을 갖다 나르는 '캣대디'가 되어 있었다.

  달라진 건 고양이를 대하는 나의 자세뿐만이 아니었다. 고양이는 존재 자체로 문학적 상상력을 자극했고, 나에게 끊임없이 무언가를 쓰도록 부추겼다. 그것이 모두 시가 될 필요는 없었다. 시든 산문이든 문장 곳곳에서 고양이는 제멋대로 튀어나왔고, 마음대로 돌아다녔다. 이 모든 것이 고양이 세계에 발을 들여놓은 업보 때문이라는 생각. 뭐 딱히 나쁠 것은 없었다. 고양이는 더 넓고 깊고 생경한 곳으로 나를 인도했고, 기꺼이 나는 고양이를 따라나섰다.

  만일 내가 고양이 세계를 알지 못했다면, 여전히 나도 고양이를 비난하는 부류에 섞여 고양이를 행해 돌을 던졌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묘생을 알아가면서 나는 조금 더 깊어졌다. 전에 없던 연민과 측은지심이 인간 아닌 것들을 감싸게 만들었다. 내가 아는 한 고양이는 결코 위협적인 떠돌이 전사나 음습한 약령의 동물이 아니었다. 지속적으로 손을 내민다면 얼마든지 손을 핥아줄 수 있는, 심장이 뜨겁고 늘 정에 굶주린 약자일 따름이었다. 고양이는 외계의 생명도 마녀의 동물도 아닌 존재로 그저 우리 곁에 살아갈 뿐이다. 나는 다만 그 당연한 권리와 이치가 뭉개진 현실에 대해 이야기하고 싶었다. 오늘 밤 길게 우는 묘생에 대하여, 상처가 깊을수록 아프지 않은 한 마리 방랑에 대하여, 그러니 그 잘난 인생들이여, 단 한 번이라도 조용하게 묘생을 돌아보라.

 

  저만치 고양이가 울고 있다.

  저만치 고양이가 웃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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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에티카』2016-하반기호 <시에티카 시로 여는 에세이>에서

  * 이용한/ 충북 제천 출생, 1995년『실천문학』으로 등단, 시집『안녕, 후두둑 씨』『정신은 아프다』. 고양이 에세이『인간은 바쁘니까 고양이가 알아서 할게』『안녕, 고양이는 고마웠어요』『명랑하라 고양이』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