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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즈비언, 게이, 바이섹슈얼, 트랜스젠더…/ 김성곤(金聖坤)

검지 정숙자 2016. 8. 2. 22:07

 

 

  『문학사상』2016-8월호/ 연재포스트모더니즘 이후의 문예사조 16회

 

 

    '레즈비언, 게이, 바이섹슈얼, 트

   랜스젠더, 퀴어 이론 LGBTQ,'

   '몸 담론 Body Discourse,' '다문화

   주의 Multiculturalism'

      김성곤(金聖坤)/ 한국문학번역원장, 서울대 명예교수

 

 

  Ⅰ. LGBTQ(레즈비언, 게이, 바이섹슈얼, 트랜스 젠더, 퀴어 이론)

   LGBTQ(레즈비언, 게이, 바이섹슈얼, 트랜스 젠더, 퀴어 이론)연구는 포스트 모더니즘 이후에 등장했으며, 사회가 정해놓은 제도와 규범을 벗어나는 성적 다양성을 용인하고 연구하는 이론이다. 포스트모더니즘의 주요 이론 중 하나는 중심과 주변의 구분을 없애고, 사물의 경계를 허물며, 절대적 선이나 진리를 회의하고 그동안 악이나 허위로 치부되어온 소외된 분야를 조명하는 것이었는데, LGBTQ 연구는 바로 그러한 인식의 변화에 힘입어 부상한 새로운 문예이론이다.

  사실 LGBTQ는 오랫동안 그늘에서 숨어 살아오다가, 1970년대 이후부터 표면으로 나와 급부상하게 되었다. 물론 그 배경에는, 최근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게 되어 더 이상 감출 필요가 없게 된 게이, 레즈비언, 바이섹슈얼, 트랜스젠더들의 부상이 자리잡고 있다. LGBTQ 연구는 사회가 정해놓은 성적 정체성에서 벗어나 자유로워지고 싶어하는 사람들을 인정하고 연구하는 이론으로서 심리학, 철학, 사회학, 역사학은 물론 생물학 및 인류학과도 긴밀하게 연관되어 있다. 

   젠더연구는 여성의 사회적 역할을 연구하는 것인데 반해, 바이섹슈얼이나 트래스젠더나 퀴어 이론은 섹슈얼리티 문제를 다루는 이론이어서 약간의 차이가 있다. 하지만 그 둘은 궁극적으로 서로 만나게 되어 있어서, 어느 하나만 독립적으로 논의하기는 어렵다. 용어의 의미를 좀 더 명확하게 구분한다면, 레즈비언은 여자 동성애자, 게이는 주로 남자 동성애자를 지칭하고 (때로는 남녀 모두 게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바이섹슈얼은 남자와 여자가 다 될 수 있는 양성애자를 의미하며, 트랜스젠더는 남녀 중 하나를 선택한 성 전환자를 지칭한다.

  학부에서 LGBTQ 코스를 처음으로 개설한 곳은 진보적인 대학으로 유명한 캘리포니아나 버클리 대학이었고, 그 뒤를 이어서 서던 일리노이대, 네브라스카대가 강의를 개설했다. 최초로 대학에 게이 레즈비언 스터디스 프로그램을 설치한 대학은 뉴욕시립대학교였고, 처음으로 퀴어 학과를 개설한 곳은 샌프란시스코시립대학이었다. 1980년대에는 예일대학교에 게이 레즈비언 스터디스 센터가 생겼고, 1991년에는 뉴욕시립대에도 게이 레즈비언 센터가 생겼다. 이후 뉴욕대 뉴욕주립대, 시카고대, UCLA, 메릴랜드대 등에도 LGBTQ 프로그램과 학위과정이 생기기 시작했다. 그러다가 2009년에는 하버드대학교에 LGBTQ 석좌교수가 임명되기에 이르렀다.

  LGBTQ라는 용어에서 '퀴어 Queer'는 원래 '정상적 Normal'의 반대되는 '이상한'이라는 뜻이기 때문에, 대학에 따라서는 '퀴어'를 빼고, LGBTSLesbian, Gay, Bisexual, and Transgender Studies'라고 하는 곳도 있다. 또 대학에 따라서 '여성학 Women's Studies', '젠더연구, 성 연구 Women's, Gender, and Sexuality Studies' 프로그램과 같은 과정들을 설치해 운영하고 있기도 하는데, 지금은 그 규모가 커져서, 예컨대 예일대학에서는 무려 15명의 교수와 석좌교수 한 사람이 LGBTS를 가르치고 있다. 

  LGBTQ 교수들은 문학, 종교, 역사, 정치학, 사회학, 인류학에 나타난 여성의 성 정체성 문제를 탐색하고 연구하는데, 시몬느 드 보부아르의 『제2의 성』과 베티 프리단의 『여성의 신비』같은 책들이 기본 지침서로 이용되고 있다. 특히 보부아르가 위 책에서 말한, "사람은 여성으로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여성으로 만들어진다"라는 말은 젠더 스터디스의 기본디 된다. LGBTQ 연구자들은 프로이트나 자끄 라깡의 심리학, 또는 쥘리아 크리스테바나 엘런 식수의 페미니즘 이론도 원용한다.

  LGBTQ 학자들은 문학작품에서 제시되고 있는 게이 레즈비언 문제를 찾아내어 논의하고 연구하기도 한다. 사실 게이 레즈비언은 고대부터 있어온 것이어서 많은 문학작품에 등장하고는 있지만, 그것이 본격적으로 논의되고, 게이 레즈비언들이 커밍아웃하기 시작한 것은 1970년 이후부터라고 보는 것이 정확할 것이다.

  요즘은 동성애가 정상애와 똑같이 취급받는 시대가 되어서, 조금이라도 편견을 가진 발언을 하면 문제가 발생한다. 성의 정체성과 선택은 사회가 정해놓은 것을 따르기보다는, 자신이 선택하는 것이라고 보는 것이 사회통념이 되었기 때문이다. 예컨대 움베르토 에코의 『장미의 이름』을 논하면서 예전에는 "14세기 유럽의 수도원은 동성애가 편재한 닫힌 사회였다"라고 논하는 것이 가능했지만, 지금은 시대가 변해서 그러한 표현이 동성애를 부정적으로 평하는 것으로 취급되어 비판의 대상이 될 수도 있다는 것이다.

  동성애는 예전에는 '호모에로틱' 또는 '호모섹슈얼'이라고 표현했으나, 지금은 그런 표현 대신 그냥 게이, 레즈비언이라고 부르는 것이 일반화되었다.

 

 

  Ⅱ. 몸 담론 Body Discourse

  순수예술과 고급문화를 주장하던 20세기 초 모더니즘 시대에는 몸과 정신을 이분법적으로 구분해 정신에게 특권을 부여했다. 즉 몸은 정신보다 열등하며 형이하학적이고, 정신은 몸보다 우월하고 형이상학적이라는 것이었다. 당시에는 사물을 이분법적으로 나누어, 둘 중 하나에만 특권을 부여하던 시절이었다. 예컨대 수순와 비순수, 고급문화와 대중문화, 이상과 현실, 정통과 이단처럼 사물을 이분법적으로 구분해 앞에 것에다가만 특권을 부여하고, 뒤의 것은 부차적이고 열등한 것으로 취급했다는 것이다. 그런 시각에서 보면 정신은 신성한 것이었지만, 몸은 세속적일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이분법적 구분이 사라진 포스트모던 시대에 오면 몸도 정신과 똑같이 중요한 것이라는 인식이 생겨나게 된다. 사실 몸이 아프고 병들면, 거기에 어떻게 건전한 정신이 깃들 수 있겠으며, 정신을 담는 몸이 없으면 어떻게 정신이 살아남을 수 있겠는가? 에드워드 사이드는 『시작』이라는 책에서 신성함과 세속젓, 또는 오리진과 시작의 이분법적 경계를 해체하는데, '몸 담론'은 우리의 몸과 영혼이 상호보충적이어서, 그 두 가지가 똑같이 중요하다는 것을 사람들이 깨달으면서 시작되었다. '이것 아니면 저것 either/or mentality'의 흑백논리에서 벗어나, '이것도 그리고 저것도 both/and'의 포용성을 갖게 되면서, '몸 담론'이 시작된 것이다.

  몸 담론의 형성에 중요한 역할을 한 것은 페미니즘이다. 페미니스트들은 남성들의 시각적 즐거움을 만족시키기 위해 여성들이 하고 있는 화장, 성형수술, 다이어트를 비판적으로 성찰하며, 그런 것보다는 유연한 여성적 원리나 글쓰기가 중요하다고 말한다. 페미니스트들은, 사실 여성들의 몸은 그동안 임신, 출산, 수유로 인해 변해가는 불완정한 것으로 취급되었는데, 사실은 바로 그러한 여성신체의 변화가 여성의 유연함과 생명력과 재생력을 드러내주고 있다고 주장한다.

  또 페미니스트들은 여성의 몸이 남성들의 관상용이 되기 위해 관능적인 신체를 유지하고, 여성다운 정숙함과 가냘픈 몸짓과 표정을 사용해야 하며, 육체적 아름다움을 전시할 것을 요구받는다고 지적하면서, 여성의 몸은 남성들의 그런 성적 요구로부터 과감히 벗어나야 한다고 말한다. 즉 몸의 중요성은 인정하지만, 몸의 관상화와 상품화는 비판하는 것이다. 그런 면에서 몸 담론은 페미니즘과도 긴밀히 연결된다. 일상에서 삶의 진리를 잘 찾아내는 문정희 시인의 시 「화장(化粧)을 하며」는 페미니즘 시는 아니지만, 훌륭한 몸 담론 시라고 할 수 있다.

 

 

   화장(化粧)을 하며

 

   문정희

 

 

  입술을 자주색으로 칠하고 나니

  거울 속에 속국의 공주가 앉아 있다

  내 작은 얼굴은 국제 자본의 각축장

  거상들이 만든 허구의 드라마가

  명실공히 그 절정을 이룬다

  좁은 영토에 만국기가 펄럭인다

 

  금년 가을 유행 색은 섹시브라운

  샤넬이 지시하는 대로 볼연지를 칠하고

  예쁜 여자의 신화 속에

  스스로를 가두니

  이만하면 음모는 제법 완성된 셈

  가끔 소스라치며

  자신 속의 노예를 깨우치지만

  착시는 이미 저항을 잃은 지 오래이다

 

  시간을 손으로 막기 위해 육체란

  이렇듯 슬픈 향을 찍어 발라야 하는 것일까

  안간힘처럼 에스테로더의 아이라인으로 

  검은 철책을 두르고

  디올 한 방울을 귀밑에 살짝 뿌려 마무리한 후

  드디어 외출 준비를 마친 속국의 여자는

  비극 배우처럼 서서히 몸을 일으킨다.

     -전문- 

 

  위 시에서 '속국의 여자'라는 표현은 제국의 상징인 남성에게 예쁘게 보이기 위해 꾸미느라, 또는 외제 화장품을 사용함으로써 문화제국주의의 각축장이자 은유적 식민지가 된 여성의 얼굴과 몸을 잘 표상해주고 있다. 몸은 정신만큼이나 중요하지만, 쉽게 세뇌될 수 있는 우리의 정신 만큼이나 쉽게 자본화되고 식민지화 될 수도 있다는 것을 이 시는 잘 형상화하고 있다.

 

 

  5. 다문화주의Multiculturalism

  '게이 레즈비언 이론'이나 '몸 담론'처럼 사회적으로 소외된 대상을 조명하고 인정하는 포스트모던 인식에 힘입어 부상한 이론 중 하나로 '다문화주의(multiculturalism)'가 있다. 식민지 피지배문화를 인정한 '탈식민주의(postcolonialism)'와 고급문화로부터 무시당하던 대중문화를 새롭게 조명한 '문화연구(cultural studies)'의 등장은 지배문화로부터 벗어나 다양한 주변부 문화들의 가치와 권리를 주장하는 다문화주의를 태동시켰다.

  다문화주의는 이 세상에 단일문화권의 단일민족이란 사실상 존재하지 않으며, 모든 나라에는 소수인종이나 소수문화가 공존해있다는 인식과, 그 모든 소수인종과 소수문화를 동등하게 인정해야 한다는 인식에서 비롯되었다. 다문화주의는 다인종 이민으로 이루어진 미국 같은 나라에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라, 사실 지구상의 모든 나난라에 다 해당되는 문예사조다. 그래서 다문화주의는 스스로를 단일문화 · 단일민족이라고 생각하고 외부인종이나 외국문화에 대해 배타적인 한국의 경우에도 절실하게 필요한 사조라고 할 수 있다. 타인종과 타문화에 대한 이해는 세계가 글로벌화 되어가고 있는 21세기 국제사회에서 살아남고 번성하기 위한 필수조건이기 때문이다.

  '다문화주의'는 단일한 지배문화 시대의 종식과, 다양한 주변부 문화의 인정과 공존을 주장하는 사조이다. 미국 같은 이민국가의 경우, 그것은 백인 중심 지배문화에 의해 주변부로 밀려나 소외되어온 소수인종 문화의 조명과 포용과 포함을 의미한다. 종교분쟁 국가의 경우, 그것은 각기 다른 종교의 공존을 의미하고, 한국처럼 분열적이고 폐쇄적인 국가의 경우, 그것은 지역문화 사이의 화해와 융합, 그리고 더 나아가 한국문화와 세계문화의 조화를 의미한다. 그와 동시에, 다문화주의는 가부장적 남성문화에 의해 가려진 소외된 여성문화의 인정을 의미하며, 동성간의 사랑 또한 이성간의 사랑처럼 동등한 대우를 받아야만 하고, 레즈비언, 게이, 양성인간, 성 전환자 연구도  당당히 정규 교과과정에 포함되어야만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물론 다문화주의는 동서양 문화의 동등한 공존으로도 확대된다. 

  다문화주의는 학교의 교과과정에도 변화를 불러왔으며, 교수나 교사 채용에도 영향을 끼쳤다. 예컨대 '다문화 교육'이라는 새로운 교육학에 의해, 백인 및 유럽문화 중심으로 이루어져온 종래의 교과과정이 대폭 변경되면서 소수인종/여성 교수나 교사들이 대거 채용된 것이다. 취직하기가 갑자기 어려워진 백인 남성들이 역차별 논쟁을 제기했음은 물론이다.

  다문화주의가 정치 및 권력과 필연적으로 연결되는 것도 바로 그런 측면에서이다. 미국의 대학에서도 학과나 연구소나 대학의 헤게모니가 그런 정치적인 이유로 옮겨가기 때문에, 다문화주의 논쟁은 흔히 학계의 권력다툼으로 확대되기도 한다. 다문화주의가 주장하는 보수주의자들로부터 정치적이라고 비난받는 또 다른 이유는, 그것의 주요 관심사가 바로 인종, 민족, 젠더, 계급인데, 그러한 접근은 언제나 정치적이 되기 쉽다. 문학작품을 연구할 때에도 다문화주의는 언제나 예술성이나 문학성보다는 텍스트 속에 들어있는 인종, 여성, 계급 문제 등을 주고 고찰하는데, 그러한 시각은 필연적으로 정치성을 띠게 되고, 과연 그러한 접근법이 문학작품의 해석에 타당한 것인가 하는 반론도 제기된다.

  더 나아가, 다문화주의는 그동안 정전으로 분류되어 있던 백인 작가들의 작품을 내려놓고, 그 대신 비정전으로 분류되어 제외되었던 소수인종 작가들의 작품들을 그 자리에 집어넣었다. 사실 그동안 지배문화에 속한 소수의 엘리트들이 임의로 정전을 결정했으며, 그 과정에서 주변부 소수인종 작가들의 작품들은 대표성이 부족하다는 이유로 정전에서 제외되어 왔다. 그러므로 다문화주의는 정전을 "누가 결정하는가?"라는 질문을 던지며 정전의 유효성과 합법성에 의문을 제기한다.

  그러나 부작용 또한 없지 않았다. 다문화주의로 인해 유럽역사 과목이 사라지고, 대신 아시아나 아프리카의 역사가 대학에서 강의되고, 알려지지 않은 소수인종 작가들과 작품들이 교과과정과 교육내용에 포함되자, 유럽계 백인남성 보수주의자들이 대학의 위기와 교육의 위기를 경고하기 시작했다. 예컨대 『미국 정신의 종언』이라는 책에서 앨런 블룸은 정통 백인문화의 사라짐을 개탄했으며, 『정전』에서 해롤드 블룸은 위대한 서구문학 정전의 퇴조를 탄식했다. E.D.허쉬는 『1학년이 알아야 할 것들 What Your I st Graders Need to Know』이라는 초등학교 교과서 시리즈를 서구문화와 정전 위주로 씀으로써, 사라져 가는 백인 유럽중심 정통교육을 다시 살려보려고 노력했다. 다만 예전에는 정통 백인들로부터 차별받던 유대계 미국인들이 이번에는 보수주의 백인 편을 들었다는 사실이 흥미롭다.

  물론 다문화주의자들은 미국이 유럽 백인문화와 더불어 원주민문화, 아프리카계 흑인문화, 아시아 문화, 히스패닉 문화로 이루어져 있기 때문에 소수인종 문화가 중요하다고 주장한다. 전통적으로 정전이 주로 남성 작가들로 구성되어 있었기 때문에, 여성작가들 역시 다문화주의를 옹호한다. 다문화주의는 문화적 다양성과 다원주의를 주장하며, 구조적 불평등에 도전해 소수문화의 권리와 인정을 요구한다는 점에서 주목할 만한 새로운 문예사조라고 할 수 있다.

 

  분명한 것은 포스트모더니즘의 등장 이래로, 고급문화와 순혈주의 시대는 끝나고 가르시아 칸클리니의 주장대로, 세상은 모든 것이 경계를 넘어 뒤섞이는 '하이브리드'의 시대가 되었다는 점이다. 과연 미국은 다문화 · 다인종 사회로 이루어진 거대한 하이브리드 국가이며, 흑백 혼열인 하이브리드 대통령까지 등장했다. 심지어는 외국인 국내거주가 200만 명이며, 다문화가정이 16만 개나 되는 한국도 급속도로 다문화사회가 되어가고 있다. 한국에서는 '하이브리드'를 '잡종'이라고 번역하지만, 사실 하이브리드는 '혼혈'이라는 좋은 뜻이다.

  하이브리드는 순형보다 우성이며, 더 총명하고 강인하다. 반면, 순혈주의는 기형이나 열성 유전인자를 확대 생산한다. 자동차의 경우도 하이브리드 자동차는 가솔린차와 전기 차의 장점을 모두 갖추고 있다. 그렇다면 경계의 해체는 새로운 것들과의 융합과 혼란을 가능하게 해주고, 순혈보다 훨씬 더 강인하고 우수한 우성인자의 산출을 촉진하게 될 것이다. 앞으로 하이브리드 문화와 혼합예술과 융합학문은 새로운 개념과 가치를 창출하여 우리에게 새로운 인식의 세계를 열어 보여줄 것이다. 경계해체(boundary crossing) 또는 크로스오버(crossover)는 이제 범세계적인 현상으로 나타나고 있다. 미래의 위대한 예술은 자신의 경계를 넘어 또 다른 세계를 탐색한 예술가들이 창출해낼 것이다. ▩

 

 

   ( ※ 챕터 넘버의 건너뜀, 원문과 다르지 않음을 밝힙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