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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병철『피로사회』「규율사회의 피안에서」/ 김태환 옮김

검지 정숙자 2016. 7. 18. 21:13

 

 

 

    규율사회의 피안에서

    -『피로사회』부분

 

     한병철(재독 철학자, 원전:독일어 刊)/ 김태환 옮김

 

 

 

  병원, 정신병자 수용소, 감옥, 병영, 공장으로 이루어진 푸코의 규율사회(Disziplinargesellschaft)는 더 이상 오늘의 사회가 아니다. 규율사회는 이미 오래 전에 사라졌고 그 자리에 완전히 다른 사회가 들어선 것이다. 그것은 피트니스 클럽, 오피스 빌딩, 은행, 공항, 쇼핑몰, 유전자 실험실로 이루어진 사회이다. 21세기의 사회는 규율사회에서 성과사회(Leistungsgesellschaft)로 변모했다. 이 사회의 주민도 더 이상 "복종적 주체(Gehorsamssubjekt)"가 아니라 "성과주체(Leistungssubjekt)"라고 불린다. 그들은 자기 자신을 경영하는 기업가이다. 정상적인 것과 비정상적인 것을 갈라놓는 규율 기관들의 장벽은 이제 거의 고대의 유물처럼 느껴질 지경이다. 권력에 대한 푸코의 분석은 규율사회가 성과사회로 변모하면서 일어난 심리적 · 공간구조적 변화를 설명하지 못한다. 자주 사용되는 "통제사회(Kontrollgesellschaft)"와 같은 개념 역시 이러한 변화를 이해하는 데 적절한 것이 못 된다. 그런 개념 속에는 지나치게 많은 부정성이 담겨 있기 때문이다.

 

 

  규율사회는 부정성의 사회이다. 이러한 사회를 규정하는 것은 금지의 부정성이다. ' ~해서는 안 된다'가 여기서는 지배적인 조동사가 된다. ' ~해야 한다'에도 어떤 부정성, 강제의 부정성이 깃들어 있다. 성과사회는 점점 더 부정성에서 벗어난다. 점증하는 탈규제의 경향이 부정성을 폐기하고 있다. 무한정한 '할 수 있음'이 성과사회의 긍정적 조동사이다. "예스 위 캔"이라는 복수형 긍정은 이러한 사회의 긍정적 성격을 정확하게 드러내준다. 이제 금지, 명령, 법률의 자리를 프로젝트, 이니셔티브, 모티베이션이 대신한다. 규율사회에서는 여전히 '노No'가 지배적이었다. 규율사회의 부정성은 광인과 범죄자를 낳는다. 반면 성과사회는 우울증 환자와 낙오자를 만들어낸다.

 

 

  규율사회에서 성과사회로의 패러다임 전환은 하나의 층위에서만큼은 연속성을 유지한다. 사회적 무의식 속에는 분명 생산을 최대화하고자 하는 열망이 숨어 있다. 생산성이 일정한 지점에 이르면 규율의 기술이나 금지라는 부정적 도식은 곧 그 한계를 드러낸다. 생산성의 향상을 위해서 규율의 패러다임은 '성과의 패러다임' 내지 '할 수 있음'이라는 긍정의 도식으로 대체된다. 생산성이 일정한 수준에 도달하면 금지의 부정성은 그 이상의 생산성 향상을 가로막는 걸림돌로 작용하기 때문이다. 능력(Konnen)의 긍정성은 당위(Sollen)의 부정성보다 훨씬 더 효율적이다. 따라서 사회적 무의식은 당위에서 능력으로 방향을 전환하게 된다. 성과주체는 복종적 주체보다 더 빠르고 생산적이다. 그렇다고 능력이 당위를 지워버리는 것은 아니다. 성과주체는 규율에 단련된 상태를 유지한다. 그는 규율 단계를 졸업한 것이다. 능력은 규율의 기술과 당위의 명령을 통해 도달한 생산성의 수준을 더욱 상승시킨다. 생산성 향상이란 측면에서 당위와 능력 사이에는 단절이 아니라 연속적 관계가 성립한다.

 

 

  알랭 에랭베르(Alain Ehrenberg)는 우울증을 규율사회에서 성과사회로의 이행기에 나타나는 현상으로 규정한다. "우울증이라는 병은 권위적 강제와 금지를 통해 인간에게 사회 계급과 성별에 따른 역할을 부여하는 구율적 행위 조종의 모델이 만인에게 자기 주도적으로 될 것, 자기 자신이 될 것을 요구하는 새로운 규범으로 대체되는 순간부터 나타나기 시작했다. [……]우울한 자는 컨디션이 완전히 정상이 아니다. 그는 자기 자신이 되어야 한다는 요구에 부응하려고 애쓰다가 지쳐버리고 만다("무제한적 가능성의 시대에 우울증은 통제할 수 없는 것을 상징한다. 우리는 우리의 정신적 · 육체적 본성을 조작할 수 있다. 우리는 우리의 한계를 다양한 수단으로 멀리 밀어버릴 수 있다. 하지만 이러한 조작은 우리를 그 무엇에서도 해방시켜주지 못한다. 강제와 자유는 변화한다. 그러나 '환원 불가능한 것'은 더 줄어들지 않는다."). 알랭 에랭베르의 논의가 안고 있는 문제점은 우울증을 단지 자아의 경제라는 관점에서만 관찰한다는 데 있다. 오직 자기 자신이 되어야 한다는 사회적 명령이 우울증을 낳는다는 것이다. 그에게 우울증은 자기 자신이 되지 못한 후기근대적 인간의 좌절에 대한 병리학적 표현이다. 그러나 우울증을 초래하는 요인 가운데는 사회의 원자화와 파편화로 인한 인간적 유대의 결핍도 있다. 우울증의 이러한 측면은 에랭베르의 논의에서 빠져 있다. 그는 성과사회에 내재하는 시스템의 폭력을 간과하고 이러한 폭력이 심리적 경색을 야기한다는 점을 인식하지 못한다. 오직 자기 자신이 되어야 한다는 명령이 아니라 성과를 향한 압박이 탈진 우울증을 초래한다. 그렇게 본다면 소진증후군은 탈진한 자아의 표현이라기보다는 다 타서 꺼져버린 탈진한 영혼의 표현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에랭베르에 따르면 우울증은 규율사회의 명령과 금지가 자기 책임과 자기 주도로 대체될 때 확산되기 시작한다. 그러나 실제로 인간을 병들게 하는 것은 과도한 책임과 주도권이 아니라 후기근대적 노동사회의 새로운 계율이 된 성과주의 명령이다. 

 

 

  알랭 에랭베르는 오늘날의 인간형을 니체의 주권적 인간과 동일시하는 오류를 범한다. "자기 자신을 닮은 주권적 인간        니체는 그러한 인간의 도래를 예고한 바 있거니와        은 바야흐로 대중의 현실이 되려는 중이다. 주권적 인간에게 그가 어떤 사람이 되어야 하는지 명할 수 있는 상위의 존재는 없다. 그는 오직 자기 자신에게만 소속된다는 원칙에 따르기 때문이다." 하지만 정작 니체라면 대중의 현실이 되려고 하는 저 인간형을 가리켜 주권적 초인이 아니라 그저 노동만 하는 최후의 인간이라고 했을 것이다. 긍정성의 과잉 상태에 아무 대책도 없이 무력하게 내던져져 있는 새로운 인간형은 그 어떤 주권도 지니지 못한다. 우울한 인간은 노동하는 동물(animal laborans)로서 자기 자신을 착취한다. 물론 타자의 강요 없이 자발적으로, 그는 가해자인 동시에 피해자이다. 강조적 의미의 자아 개념은 여전히 면역학적 범주다. 그러나 우울증은 면역학적 도식 바깥에 있다. 우울증은 성과주체가 더 이상 할 수 있을 수 없을 때 발발한다. 그것은 일차적으로 일과 능력의 피로(Schaffens- und KOnnensmudigkeit)이다. 아무것도 가능하지 않다는 우울한 개인의 한탄은 아무것도 불가능하지 않다고 믿는 사회에서만 가능한 것이다. 더 이상 할 수 있을 수 없다(Nicht-Mehr-Konnen)는 의식은 파괴적 자책과 자학으로 이어진다. 성과주체는 자기 자신과 전쟁 상태에 있다. 우울증 환자는 이러한 내면화된 전쟁에서 부상을 입은 군인이다. 우울증은 긍정성의 과잉에 시달리는 사회의 질병으로서, 자기 자신과 전쟁을 벌이고 있는 인간을 반영한다.

 

 

  성과주체는 노동을 강요하거나 심지어 착취하는 외적인 지배기구에서 자유롭다. 그는 자기 자신의 주인이자 주권자이다. 그는 자기 외에 그 누구에게도 예속되어 있지 않은 것이다. 그 점에서 성과주체는 복종적 주체와 구별된다. 그러나 지배기구의 소멸은 자유로 이어지지 않는다. 소멸의 결과는 자유와 강제가 일치하는 상태이다. 그리하여 성과주체는 성과의 극대화를 위해 강제하는 자유 또는 자유로운 강제에 몸을 맡긴다. 과다한 노동과 성과는 자기 착취로까지 치닫는다. 자기 착취는 자유롭다는 느낌을 동반하기 때문에 타자의 착취보다 더 효율적이다. 착취자는 동시에 피착취자이다. 가해자와 피해자는 더 이상 분리되지 않는다. 이러한 자기 관계적 상태는 어떤 역설적 자유, 자체 내에 존재하는 강제구조로 인해 폭력으로 돌변하는 지유를 낳는다. 성과사회의 심리적 질병은 바로 이러한 역설적 자유의 병리적 표출인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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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피로사회』제1판 제 1쇄 2012년 3월 5일, 제1판 제 40쇄 2015년 9월 30일, <(주)문학과지성사> 펴냄

  * 한병철/ 고려대학교에서 금속공학을 전공한 뒤 독일로 건너가 철학, 독일 문학, 가톨릭 신학을 공부했다. 1994년 하이데거에 관한 논문으로 박사학위를 받고, 2000년에는 스위스 바젤 대학에서 데리다에 관한 논문으로 교수 자격을 취득했다. 독일과 스위스의 여러 대학에서 강의했으며, 독일 카를스루에 조형예술대학 교수를 거쳐 현재 베를린 예술대학 교수로 재직 중이다.

  『피로사회』(2010), 『투명사회』(2012) 등의 저작이 독일에서 커다란 사회적 반향을 일으키며 가장 주목받는 문화비평가로 떠올랐다. 『피로사회』는 2012년 한국에도 소개되어 주요 언론 매체의 '올해의 책'으로 선정되는 등 한국 사회를 꿰뚫는 키워드로 자리 잡았다.

  그 밖에도 『시간의 향기』『권력이란 무엇인가』『에로스의 종말』『폭력의 위상학』등 여러 권의 책을 썼다.

  * 김태환/ 서울대학교 사범학과를 졸업하고 같은 학교 대학원 독어독문학과에서 박사학위를, 오스트리아 클라겐푸르트 대학에서 비교문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현재 서울대학교 독어독문학과 교수로 재직 중이다.

  지은 책으로 『푸른 장미를 찾아서 - 혼돈의 미학』『문학의 질서』『미로의 구조』등이, 옮긴 책으로 『투명사회』『시간의 향기』『모던/ 포스트모던』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