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라문학』2016-여름호 <추모특집>에서
미명(未明)의 신앙(信仰)
랑승만(1933~2016, 83세)
1
밖은 기나긴 패연(沛然)의 소리를 전달(傳達)하는
창(窓)의 밤입니다.
내 안에 머물지 않고 지나가는
그런 세월(歲月)의 수억(數億)의 밤이
겉으로만 흘렀던 저 심원(深源)한 강물의
기다림 같은,
한낱 보이지 않는 과실(果實)을 생각해보는 것입니다.
또는, 굳게 안으로 푸르르게 닫혀 있을
바위 속의 가장 뜨거운 눈물 같은, 그것이
언제이고 그 겹겹이 어둠을 뚫고
솟아나는 폭포(瀑布)의
시원(始源)임을 또한 잊지 않습니다.
2
무엇으로 가벼이 이름 지을 수 없는 당신 앞의 암흑(暗黑)을
나도 하나 넘치게 담고,
오직 풀잎처럼 성장(成長)을 발원(發願)
하는 마음으로
기다리는 당신과 나의 새벽을
가장 아득한 지평(地坪)에서부터
예상(預想)하고 있습니다.
열리지 않는 미명(未明)의 바람 속에서 꽃망울은
더욱 안으로부터 열려질 일이 아닙니까.
한 겹 두 겹 열어 젖힌 가슴의 절정(絶頂)에
닿아
어느 아침 눈부실 일순(一瞬)의 발돋움으로
얼었던 뿌리여.
한 발자국 당신 앞에 다가서는 것입니다.
-전문-
▶ 피안의 세계로 날아간 영혼의 새(발췌) : 최일화
-랑승만 시인 시문학 60년을 돌아보며
2016년 4월 28일 한 시인이 세상을 떠났다. 인천 연수구 한 작은 임대아파트에서 84세의 시인이 영욕의 삶을 마감하며 쓸쓸하게 세상을 떠났다. 가난과 병고의 세월 36년을 훌훌 털어내고 피안의 세계로 날아갔다. 그가 그토록 그리던 김관식, 천상병을 비롯한 많은 문우들이 기다리는 곳을 찾아 날아갔다. 아니 부처님과 어머니의 곁으로 훨훨 날아갔다.
수만 명은 족히 된다는 문인들 중 그를 기억하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을 것이다. 기억을 하고 설령 그 이름을 알고 있다고 해도 얼른 찾아가 문상을 해야겠다는 생각을 하는 문인들은 많지 않았을 것이다. 그는 잊혀진 시인이었기 때문이다. 1956년 등단하여 19권의 시집을 내며 현역 시인으로 활동했으면서도 그는 문단에서 많이 잊혀져 살았다. 모두 그의 가난과 병고 때문이었다.
수많은 시인이 쏟아져 나오는 작금의 문단 현실에서 거동이 불편하여 어두컴컴한 골방에 유폐된 듯 살아가는 한 늙은 시인에게 따뜻한 관심을 가질 사람은 많지 않다. 1980년 한국잡지협회 이사회에 참석한 후 뇌졸중으로 쓰러진 이후 시인은 모든 사회생활을 접고 병석에서 투병생활을 이어가야 했다. 발병하기 전 두 권의 시집을 냈던 시인은 발병 이후 17권의 시집을 냈다. 기적 같은 일이다.
19권의 시집을 세상에 남기고 시인은 영혼의 새가 되어 피안의 세계로 날아갔다. 발병하기 전 부인과는 이미 헤어지고 어린 두 아들을 돌보며 살아온 삶이 어떠했으랴. 그를 지탱해준 것은 오로지 문학이었고 병고와 가난도, 절망도 희망도, 세상에 대한 원망과 분노도 모두 문학으로 수렴되었다. 곁에서 그에게 용기를 불어넣은 분은 오로지 부처님이었다. 부처님께 귀의하여 그곳에 진리가 있음을 간파하고 그 말씀에 귀의한 일생이었다.
긴 병에 효자 없다는 말이 있다. 긴 병 앞엔 아내도 자식도 외면하고 만다는데 활동을 못하는 늙은 시인에게 지속적으로 도움을 주고 보살펴줄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한때는 대한민국 최고의 시인들 반열에서 한국 시단을 떠맡았던 시인은 차츰 동료 시인들과도 연락이 끊겼으며 그 비애와 고독이 어떠했을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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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라문학』2016-여름호 <추모특집> 에서
* 랑승만/ 서울 출생(1933~2016), 1956년『문학예술』로 등단, 시집『억새풀의 땅』『이 따뜻한 시간에 목련꽃 한 송이』외.
* 최일화/ 『계간문예』로 등단, 시집『우리 사랑이 成熟하는 날까지』『어머니』『소래갯벌공원』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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