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특집 2016 만해축전 학술세미나 ▒
현대 불교시인 연구Ⅱ
時計 소리를 드르면서
김일엽(金一葉, 1896~1971, 75세)
無常殺鬼의 발자국인 저 시계 소리는 나의 가슴을 얼마나
뛰게 하는가
나는 나의 온 곳도 모르거니와 갈 곳 또한 알 수가 없나
나는 왜 또는 어떻게 이 살이에 던져졌는지 모른다.
다만 나를 따르는 저 살귀의 발자국 소리가 급한 것을 들을
뿐이다
저 살귀의 검은손은 오늘 밤이라도 내일 아침이라도 나의
덜미에 덮칠지 모른다.
덮치었다가 또 어떤 살이에 던지어버릴지도 알 길이 없다
스스로의 전후살이를 좋거나 그르거나
저 험상궂은 논바닥에 던져두지 아니치 못하는 미약한 내가
무엇을 위하여 싸우려 했던가 무엇에 의지하여 노력하려 했
던가
저 험한 손은 태산을 문허 평지를 만들고 바다를 말려 길바
닥을 지을 날을
집어 오고야 말 것이다.
(…)
……근본 힘을 찾아 無道한 살귀의 손에서 휘어나야 하지
않겠는가
어찌 그리 무심하게도
산 너는 우두커니 서 있기만 하고
물 너는 절절 흐르기만 하는가
아아 無常殺鬼의 발자국인 저 시계소리는 점점 더 크게 들
려오는구나.
-전문, (『신여성』,1933.12.)* <시의 말미에 '직지사 여선원에서' 라고 부연되어 있는데, 1933년 6월경 수덕사에 입산했던 김일엽이 그해 겨울 직지사에 머물렀을 때 쓴 것으로 보여진다.>
▶ 김일엽의 초기 불교시 고찰(발췌)_ 송정란
"나의 온 곳도 모르거니와 갈 곳 또한 알 수가 없"는 공간 속에서 시간은 하염없이 흘러가고 있다. 늘 제자리에서 머물러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한번 흘러가면 다시 돌아오지 않는 것이 시간이다. 언제든지 나의 덜미를 잡아 죽음으로 몰아넣을 수 있으며 윤회의 수레바퀴 속에 던져놓을 수 있는 것이 또한 시간이다. 그래서 무지막지한 '무상살귀'의 시간 앞에서 인간은 나약한 존재일 수밖에 없다. 불교에서 '무상살귀'는 무상한 세월을 의미하는 것으로 그 어느 것도 영원한 것이 없음을 말한다. 그런데 시계소리는 무상살귀의 발자국으로 화하여 생멸의 고뇌를 심어주기도 하지만, 하루바삐 시간을 아껴 정진해야 한다는 자아 각성의 소리를 들려주기도 한다.*<시계추를 무상살귀에 비유한 시적 서술은 백성욱의 영향이라 할 수 있다. 1928년 어느 날 백성욱은 김일엽에게 불법을 가르치면서 인간의 유한한 삶을 시계추에 빗대어 하루빨리 각성하기를 설파한 바 있다. "(…) 가실 때 구두끈을 매시면서도 '똗딱 똑딱 시계추의 생리는 無常殺鬼가 우리 목숨을 빼앗으러 오는 발자국소리니 이 몸, 곧 사람의 몸을 받은 이때에 시급히 일을 마쳐야 하는 것이요, 영구적인 생은 금생의 연장이니 금생에 확고한 정신을 가지는 것이 死의 대비인데, 사에 대비가 없으면 멀고 먼 前程이 어찌 될 것이요' 하는 말씀을 남기고는 뒤도 안 돌아보고 천천히 가버리셨나이다." (김일엽,『청춘을 불사르고』, 40쪽)> 시적 화자는 '태산을 무너뜨려 평지를 만들고 바다를 말려 길바닥을 지을' 수 있는 구도의 길을 찾아 무상살귀로부터 벗어나고자 한다. 그리하여 "산 너는 우두커니 서 있기만 하고/ 물 너는 절절 흐르기만 하는가"라며 입산을 결행하지 못하는 자신의 처세를 나무라며, "무상살귀의 발자국인 저 시계소리가 점점 더 크게 들려"온다며 출가의 시간이 임박했음을 스스로에게 이르고 있다.
(※ 블로그 후기/ 제목 부분 "드르소서" 등 이 글의 맞춤법; 본문에 의거함.)
------------------
*『불교문예』2016-가을호 <특집 2016 만해축전 학술 세미나/ 현대 불교시인 연구Ⅱ/ 송정란 편> 발췌
* 송정란/ 1990년 『월간문학』시, 2000년《중앙일보》신춘문예 시조 등단, 시집『불의 시집』『허튼 층 쌓기』외. 저서『한국 시조시학의 탐색』『스토리텔링의 이해와 실제』. 현재 건양대학교 기초교양교육대학 교수.
'작고 시인의 시' 카테고리의 다른 글
송기한_박남수 시와 자연(발췌)/ 새1 : 박남수 (0) | 2016.10.03 |
---|---|
고재석_신심과 시심의 행방, 신석정의 경우(발췌)/ 자책저음(自責低吟) : 신석정 (0) | 2016.09.29 |
김창희_바람의 말(言)/ 적막강산 : 임강빈 (0) | 2016.09.08 |
최일화_ 피안의 세계로 날아간 영혼의 새(발췌)/ 미명의 신앙 : 랑승만 (0) | 2016.07.21 |
연꽃 만나고 가는 바람같이/ 서정주 (0) | 2016.07.08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