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삼가 애도를 표합니다 >
적막강산
임강빈(1931~2016, 85세)
나의 첫 시집 '당신의 손'에는
고독이나 슬픔이란 단어가 없다
유치하다는 생각에서
애초 버리기로 했다
나이 들면서
넘어지고 깨지고 하면서
이런 낱말이 고개를 들기 시작했다
과용할 만큼
마감 날이 가까이 왔다
고독이나 슬픔 같은
사치스러운 시어는 이제 버리자
그냥
적막강산이면 된다
-전문-
▶ 바람의 말(言)_ 김창희(시인)
임강빈 시인의 시집 『바람, 만지작거리다』는 그의 열세 번째 작품집이다. 1956년 『현대문학』으로 등단하였으니 회갑의 시력을 헤아리게 된 셈이다. 시집 서두의「시인의 말」에서 "앞으로 시가 몇 편 나올지 모르지만, 그러나 시집은 이번이 마지막일 것이다"라고 소회를 밝혔다. 이는 아장아장 걸음마를 배우기 시작한 시절부터 장년의 풍요롭고 힘찬 발걸음을 내디뎠을 시간들을 지나 노련하고 완숙한 경지의 노년을 살아 낸, 노장의 담담하고 넉넉한 품이 느껴지는 한마디이다. 특히나 시집의 제목으로 쓰인『바람, 만지작거리다』는 통상 다른 시집들에서 다루는 대표시의 제목이나 시 작품 속의 어느 한 부분을 따온 것이 아닌, 시집 전체의 분위기들을 은유화한 것이라 보여진다.
'떠나가는 것'들과 '빠져나가는 것'들, 그리고 영사기의 필름처럼 '되돌려 보여지는 것'들로 버무려진 시편들의 간격은 조밀하다. 시인은 이를 '바람, 만지작거리다'로 대변하고 있다. '바람'은 살아있는 움직임의 표상이며 변화와 흐름의 다른 표기이다. 시인에게 '바람'은 시인 자신이 살아가는 삶의 형상으로, 이를 '만지작거리'는 행위는 다독이고 위로하는 포용의 몸짓이며 감사의 눈길이다.
총 85편의 시가 실린 시집 속에는 나이 들어 병원행이 잦아진 시인의 일상과 서로의 투병생활로 소원해졌던 벗들의 부음, 수명을 다한 치아들이 쑥쑥 빠져나가는 현실적 위기를 간결하고 직설적인 시어로 표현하고 있다. 그리고 살아오면서 도움을 받고도 당연시했던 것들(자신의 그림자, 사시사철 아름다움을 보여주었던 대자연, 아내가 혼수로 가져와 지금껏 쓰고 있는 은수저 등)에 대한 고마움을 동시와 같은 단순한 시어의 맑은 여운으로 살려내고 있다.
위의 시「적막강산」은 시집의 맨 마지막에 실린 작품이다. "나의 첫 시집 『당신의 손』에는/ 고독이나 슬픔이란 단어가 없다/ 유치하다는 생각에서/ 애초 버리기로 했다" 늘 새로운 곳을 행해 나아가고자 했던 꿈 많은 교육자이자 젊은 시인이었을 시인의 팔팔한 기상이 느껴진다. 때문에 '슬픔'과 '고독'은 세상을 향해 힘껏 발돋움해야 할 청춘에겐 유치한 감정 과잉일 수도 있었을 것이다. "나이 들면서/ 넘어지고 깨지고 하면서/ 이런 낱말이 고개를 들기 시작했다/ 과용할 만큼" 인생의 그늘을 갖지 않으리라 다짐했지만 삶의 우여곡절은 원하지 않는 순간 '슬픔'과 '고독' 속으로 우리를 밀어 넣는다. 삶이란 시간 속에서 너무도 빈번했던 '고독'과 '슬픔'의 항로를 지나다 보니 그것은 어느새 시인에게 '사치스러운' 시어가 되어 버렸다. 또 다시 버리고 비워야 할 순간, 시인은 이쯤에서 "그냥/ 적막강산이면 된다"로 일갈한다. 이는 시인으로서의 시창작에 대한 여정으로 보여지기도 하지만 한 생명이 태어나고 자라고 번성하여 열매 맺는 성숙과 완숙의 경지를 보여주는 것이기도 하다.
1931년에 태어난 시인은 올해로 85세를 맞이하였다. 이번 시집『바람, 만지작거리다』는 시인 자신이 자신의 삶에게 보내는 고별의 인사와 미지의 곳으로 떠나야 할 순간을 기다리는 시인의 심정을 잘 드러내 주고 있다. '적막강산' 곧 '고요해지는 것'이란 뜻이리라.
시집 서평을 위해 시집을 건네 받은 지 얼마 되지 않아 시인의 부음을 들었다. 처연한 심정으로 시집을 다시 펼쳐보았다. 자신의 생이 얼마 남지 않았으리라는 예측이 시집 속에 고스란히 담겨 있다. 생의 완성은 '그저 고요해지는 것' 시집 위에 손을 얹고 인사를 올린다. "임강빈 선생님, 선생님의 시로 많은 위로와 기쁨을 얻었습니다. 가시는 길 부디 평안하소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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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과창작』2016-가을호 <문학 초점>에서
* 임강빈(1931-2016, 향년 85세))/ 호-우봉(又峰), 공주 출생, 공주중학교, 공주사범대학 국어교육과 졸업
-1952년 청양중학교 교사로 교육계에 입문 후 1996년 대전 용전중학교장으로 정년퇴임
-1956년 『현대문학』으로 등단
-시집 『당신의 손』『동목(冬木)』『매듭을 풀며』『등나무 아래에서』『조금은 쓸쓸하고 싶다』『버리는 날의 반복』『버들강아지』『버리는 날의 향기』『쉽게 시가 쓰여진 날은 불안하다』『한 다리로 서 있는 새』『집 한 채』『이삭줍기』등
-충남도문화상, 요산문학상, 공산교육상, 상화시인상, 대전시인상, 정훈문학상 등 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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