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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자반응비평/ 김성곤(金聖坤)

검지 정숙자 2016. 5. 20. 01:13

 

 

『문학사상』2016-3월호/ 연재포스트모더니즘 이후의 문예사조 11회

 

 

     독자반응비평

 

      김성곤(金聖坤)/ 한국문학번역원장, 서울대 명예교수

 

 

 

  1. 문학작품의 해석   저자의 의도인가, 독자의 반응인가?

   문학작품을 읽고 해석할 때, 감추어진 저자의 의도가 중요한가, 아니면 그 작품을 수용하는 독자의 반응이 중요한가, 하는 문제는 문단과 학계에서 오랜 논란이 되어 왔다. 텍스트의 자기 충족성(self-sufficiency)을 중시한 신비평가들은 저자의 의도나 독자의 반응은 둘 다 중요하지 않고, 작품 자체의 심미적 분석이 중요하다고 보았다. 그래서 신비평가인 윌리엄 윔사트와 먼로 비어드슬리는 저자의 의도를 중시하는 것을 '의도적 오류(Intentiional Fallacy)', 그리고 독자의 반응을 중시하는 것을 '감정적 오류(Affective Fallacy)'라고 불렀다.

  그러나 1960년대 포스트모더니즘이 등장하면서, 신비평의 시각에 반발해 작품 해석에 있어서 독자의 반응을 중요시하는 새로운 사조가 등장했는데, 그것을 '독자반응비평(reader response criticism)'이라고 부른다. 독자반응비평 이론에 의하면, 저자의 의도나 작품이 함축하고  있는 의미보다는 작품을 수용하는 독자의 반응이 훨씬 중요하며, 따라서 독자는 저자와 함께 작품의 의미산출에 동참하는 공저자가 된다. 그것은 곧 문학작품에는 고정된 결말이나 의미가 없고, 각기 다른 독자에 따라 다양한 해석이 가능하다는 것을 의미한다.

  독자반응비평은 문학 해석에 있어서 텍스트만을 중시했던 신비평과 형식주의 비평, 그리고 저자에게 무소부재의 권위를 인정했던 모더니즘에 반발해 1960년대부터 시작된 새로운 문학이론이다. 예컨대 신비평은 문학 해석에 있어서 저자의 의도나 독자의 감성, 또는 작품의 역사적 · 사회적 맥락은 전혀 중요하지 않으며, 오직 텍스트 자체의 심미적 감식과 엄정한 분석만이 중요하다고 보았다. 한편, 모더니즘은 저자가 독자보다 우위에 있으며, 독자는 저자가 이끄는 대로 따라오다가, 저자가 제공해주는 진리와 깨달음과 결말을 받아들여야 한다고 보았다. 독자반응비평은 그 두 가지 모두에 반발하면서 시작되었다.

  독자반응비평에 의하면, 자자의 의도나 작품의 배경보다는 그 작품을 읽고 수용하는 독자가 더 중요하다. 즉 모든 작품은 독자의 감정, 경험, 교육, 성장배경에 따라서 달리 해석될 수 있기 때문에 작품 해석의 다양성과 무한한 가능성을 인정해야만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독자반응비평은 책을 읽는 동안 독자가 만들어내는 각기 다른 해석의 도출에 관심이 많다. 독자반응비평이 현상학, 심리분석학, 그리고 해석학과 긴밀하게 연관되어 있는 이유도 바로 거기에 있다.

  제인 탐킨스(Jane Tompkins)가 1980년에 출간한 『독자반응비평: 형식주의에서 탈구조주의로Reader-Response cism: From Formalism to Post-Structuralism』의 표지에는 지하철에서 승객들이 같은 책을 읽는데, 한 사람은 웃고 한 사람은 우는 그림이 그려져 있다. 독자의 감성이나 배경에 따라서 같은 작품이라 할지라도 다르게 받아들이는 것이 가능하다는 것이다. 물론 하나의 작품이 독자에 따라 무한히 다르게 해석된다면, 혼란을 야기하지 않겠냐는 비판과 우려도 있을 수 있다. 그러나 무질서의 가치에 대한 인정과 무질서 속에서 질서를 보는 것이야말로 독자반응비평이 갖고 있는 포스트모더즘적 특성이다. 그래서 독자반응비평은 무질서처럼 보이는 것에 질서를 부여하려고 하면 안 된다고 말한다. 서구 제국주의도 바로 그런 사고방식과 태도로 인해 생성되었고 합리화되었기 때문이다.

  다만 스탠리 피시 같은 이론가는 '해석의 공동체(interpretive community)라는 개념을 통해 혼란스러워 보이는 것을 정리한다. 즉 비슷한 문화적 배경이나 성장과정, 또는 같은 수준의 교육을 공유하는 독자라면 어느 정도  비슷한 해석을 하게 되리라는 것이다. 예컨대 한국인 특유의 해석도 있을 수 있고, 지식 수준이 비슷한 사람들의 공통의 해석도 가능하다는 것이다. 비슷한 맥락에서 콜롬비아 대학의 마이클 리파테르는 대중 독자가 아닌 수준 높은 '수퍼 독자'를 상정했고, 독일의 독서이론가 볼프강 이저는 텍스트가 기대하고 또 내포하고 있는 '암시된 독자'를 상정했다. 필자는 리파테르와 이저를 각각 뉴욕과 서울에서 만나 그들의 독자반응비평 이론에 대해 논의할 기회가 있었는데, 두 사람 다 대중 독자와는 조금 다른 일정 수준의 독자 그룹을 상정하고 있었다.

 

 

  2. 독자반응비평의 등장배경

  독자반응비평은 1960년대 초, 교수들이 대학에서 문학을 가르치다가 학생들의 해석이 각기 다른 것을 발견하면서 시작되었다고 알려져 있다. 학생들은 수업시간에 과제로 읽어온 작품에 대해 각기 다른 해석을 내놓았고, 교수들은 그 모든 해석이 전부 가능할 수도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 것이다. 그래서 문학교수들은 문학작품의 객관적 책읽기나 단 하나의 정해진 결말이란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인정하게 되었고, 그 결과로 나온 것이 바로 독자반응비평이다.

  그러다가 1967년에 스탠리 피시(Stanley Fish)가 밀턴의 『실낙원』을 독자반응비평으로 읽어낸 『죄에 놀라서: 실낙원 속의 독자Surprised by Sin: The Reader in Paradise Lost』를 출간하면서, 독자반응비평 이론 논의가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인류의 타락을 그려낸 밀턴의 대작은 기독교 독자와 불교 독자, 무신론자들로부터 각기 다른 해석을 도출해내었는데, 피시는 배경이 서로 다른 이들을 각기 다른 '해석의 공동체'라고 불렀다. 필자는 1983년에 미국 콜롬비아 대학의 객원교수로부터 『실낙원』을 배웠는데, 그는 학기 내내 독자반응비평에 입각한 책읽기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1970년에 피시는 독자반응비평의 매니페스토 격인 「독자 속의 문학: 감정적 책읽기」라는 글을 발표했다. 이 글은 문학작품을 읽을 때 발생하는 '감정적 오류'를 경계했던 신비평에 대한 정면 도전이었다. 즉 피시는 책을 읽을 때, 독자의 반응은 본질적으로 주관적이고 감정적일 수밖에 없다고 선언한 것이다.

  피시의 독자반응비평 이론은, 독자의 책읽기 과정을 슬로우 비디오로 포착하여 보여주는 것과 비슷하다. 그는 텍스트를 읽을 때 생겨나는 독자의 반응을 주시하며, 책읽기란 마치 슬로우 모션 카메라가 독자의 언어적 경험을 촬영하여 보여주는 것과 같다고 설명한다. 피시에게 있어서 '텍스트의 의미'란 책읽기 과정에서 생겨나는 독자의 반응에 의해 산출되는 결과물과도 같다. 그러므로 피시에게 있어서, 문학작품은 독자의 마음속에서 일어나는 사건이나 경험이지, 고정된 의미를 가진 대상은 아니다.  

  물론 피시의 독서이론도 문제점을 내포하고 있다. 피시의 이론은, 독자의 반응이란 사실 완전히 무작위적인 것이 아닌, 저자가 그 효과를 노리고 숨겨 놓은 법칙들에 의해 유발된다는 가정에서 시작된다. 그렇다면 독자는 궁극적으로 저자의 의도를 성취시켜주는 셈이며, 독자가 책을 읽으면서 겪는 과정도 사실은 저자의 창조물이라는 말이 된다.

  문제는 모든 부류의 독자들이 다 저자의 의도를 충족시켜 줄 만큼 수준이 높지는 않다는 데 있다. 그래서 피시는 자신이 의미하는 독자란, 곧 '교양 있는 독자(informed reader)'라고 말한다. 그는 '교양 있는 독자'란 우선 텍스트에 사용된 언어를 잘 구사하는 사람을 의미하고, 다음으로 그 쓰여진 내용을 이해할 수 있는 지식을 갖춘 사람을 의미하며, 마지막으로 문학적 센스와 소양이 있는 사람을 의미한다. 그러나 피시의 이와 같은 '교양 있는 독자' 또는 '해석의 공동체' 이론은 그것이 내포하고 있는 엘리트주의로 인해 비판의 여지가 있다. 예컨대, 그의 이론에 의하면 저자와 언어나 문화를 잘 모르는 독자는 논의에서 제외된다. 그러나 그의 이론의 장점은, 그러한 설정이 자칫 독자반응비평이 초래할지도 모르는 무정부주의적 혼란을 피할 수 있다는 점이다.

  자신의 독자반응비평 이론이 구체적으로 예시되어 있는 저서인 『수업에 교재가 있나요? Is There a Text in This Class?』의 제목을 설명하면서 피시는, 자기 수업에 들어온 존스홉킨스 대학의 한 여학생이 학기 첫 시간에 어느 교수에게 "이 수업에 교재가 있나요?"라고 물었던 에피소드를 언급하고 있다. 그 교수가 "물론이지. 노튼 앤솔로지야"라고 대답하자, 그 여학생은 "아니오. 저는 이 수업에서 우리가 시나 작품을 믿을 건지, 아니면 우리 자신을 믿을 건지를 여쭤본 건데요"라고 말했다고 한다. 이것은 독자도 작품의 의미산출에 적극 참여하는, 작품과 똑같은 비중의 존재라는 것을 잘 예시해주고 있다.

  스탠리 피시는 작품을 읽으면서 독자가 채워 나가는 빈칸이 작품의 소유가 아니라 독자의 소유가 된다고 주장한다. 그러므로 피시는 "의미의 일부는 작품에서 나오고 또 일부는 독자에게서 나와서 작품을 완성시킨다"라는 견해에 반대하며, 비평의 관심대상을 작품으로부터 독자로 바꾸어야 한다고 주장한 진정한 독자반응 비평가였다.

  1968년에는 대표적인 심리분석 학자인 노먼 홀랜드(Norman Holland)가 『문학반응의 역학The Dynamics of Literary Response』이라는 저서에서 그의 전문분야인 심리분석 이론을 통해 독자반응비평 이론 논의에 참여했다. 그는 같은 작품에 대해 학생(독자)들이 보인 각기 다은 반응을 이용해, 학생(독자)들의 심리를 분석하는 작업을 했다. 1970년대에 홀랜드에는 버펄로 소재의 뉴욕주립대에서 '심리분석학 센터'를 창설하고, 동료 심리분석 학자들인 머리 슈워츠, 밥 로저스, 데이빗 윌번 및 대학원 학생들과 '델피 세미나'를 열어서, 심리분석을 통한 독자반응비평이라는 독자적인 분야를 개척했다. 그때 마침, 뉴욕주립대에서 박사 공부를 하고 있던 나도 홀랜드의 심리분석 이론과 복자반응비평 이론에 대해 배울 수 있었다.

  당시 뉴욕주립대 영문과는 최고의 교수진으로 명성을 떨치고 있었는데, 그중에는 저명한 프랑스 사상가 미셸 푸코와 노벨상 수상작가 존 쿳시, 내셔널 어워드 수상작가 존 바스, 또 블랙 마운틴 그룹의 리더이자 투사시(投射詩)의 창설자였던 시인 찰스 올슨과 로버트 크릴리, 그리고 소설의 죽음을 선언하고 대중문화 시대의 도래를 예언한 유명한 문화평론가 레슬리 피들러가 있었다. 그들은 모두 직간접적으로 심리분석 이론과 독자반응비평의 결합에 동조했고, 그 이론을 풍요롭게 하는 데 일조했다.

 

 

  3. 독일의 독서이론   볼프강 이저와 한스 야우스

  한편 독일의 콘스탄츠 대학교에서도 독서이론이 활발하게 일어나고 있었는데, 독일에서는 그것을 수용미학이라고 불렀다. 볼프강 이저(Wolfgang Iser)와 한스 로베르트 야우스(Hans Robert JauB)가 주도한 독일 콘스탄츠 학파의 이론적 특징은 독자의 각기 다른 해석을 모두 허용한 미국과는 달리, 독자의 반응을 텍스트에 의해 어느 정도 조종되는 것으로 보았다는 데 있다. 그러므로 독일의 독서이론은 다소간 통일된 반응과 해석을 기대한다. 특히 야우스에 의하면, 텍스트는 '암시된 독자(The Implied Reader)'을 대상으로 쓰여지는 것이고, 그 '암시된 독자'는 텍스트에 대해 '기대지평(Erwartungshorizont)'을 갖고 읽게 된다고 보았다.

  볼프강 이저는 독자를 텍스트의 해석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일종의 공저자로 보았다. 이저에 의하면 독자는 책을 읽으면서 텍스트 속에 암시되어 있는 부분을 자신의 결험과 상상력을 통해 보충하고 구체화한다. 그러므로 이저에게 있어서 작품의 의미산출이나 해석은 궁극적으로 독자의 참여로 인해 이루어지는 것이며, 그것은 곧 텍스트의 해석이 고정되지 않고 열려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저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그러므로 문학 텍스트는 독자의 '상상력'과 불가분의 관계를 갖고 있다. 왜냐하면 독서는 능동적이고 창조적일 때만 즐거움을 주기 때문이다. 바로 그런 이유로 해서 하나의 텍스트는 여러 가지 의미를 가질 수 있다. 독서는 결코 텍스트의 완전한 해석을 성취할 수도 없고 그 무한한 의미를 다 고갈시킬 수도 없다. 왜냐하면 독자는 각자의 방법으로 텍스트를 이해하고 그 간격을 채워 나가기 때문이다. 책읽기에는 예상과 회상이 활발하게 뒤섞인다. 그것은 텍스트 자체가 제공해주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텍스트와 독자의 마음(경험, 의식, 전망)과의 만남에서 생성되는 것이다.

 

  이저의 책읽기 이론의 장점은, 텍스트의 의미산출을 할 수 있는 능력을 독자에게 부여함으로써 독자가 작품의 해석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게 해준다는 데 있다.

  그러나 이저 이론의 문제점은, 그가 독자의 책읽기를 작품 속에 이미 암시되어 있는 것을 찾아내어 채우고 완성하는 것으로 보기 때문에, 독자에게 진정한 의미의 창조를 허용하지 않는다는 데 있다. 즉 이저는 독자의 자주성이나 텍스트로부터의 완전한 독립을 인정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이저가 말하는 '독자'란, 저자가 텍스트 속에 이미 암시해 놓은 것을 찾아내는 '암시된 독자'일 뿐이다. 또한 이저는 독자의 창조적 역할과 다양한 해석의 가능성을 허용하면서도, 또 한편으로는 독자에게 깨달음을 가져다주는 것은 결국 텍스트라고 말함으로써, 여전히 텍스트를 중시하고 있다. 더 나아가, 이저는 어떤 독자의 깨달음은 다른 독자의 깨달음보다 더 텍스트의 의도에 부합된다고 주장한다. 즉 이저의 이론에 의하면 독자는 텍스트를 완성시켜주는 역할을 할 뿐이어서, 결국은 텍스트의 힘이 독자를 압도하고 독자에게 빈칸을 채우라는 지시를 내리게 된다.

 

 

  4. 독자반응비평과 포우의 추리소설

  독자반응비평의 경우를 잘 보여주고 있는 작품으로는 에드거 앨런 포의 『모르그가의 살인The Murdesrs in the Rue Morgue』이 있다. 이 단편소설에서는 두 여인이 살해를 당하는데, 당시 그 방에서 들려 나오는 범인의 목소리를 아래층의 사람들이 듣는다. 신문에 보도된 그들의 진술에 의하면 프랑스인은 그 소리가 스페인어 같다고 말했으며, 네델란드인은 프랑스어, 영국인은 독일어, 스페인인은 영어 같았다고 말했다. 또 이탈리아인은 러시아어처럼 들렸다고 말했으며, 또 다른 프랑스인은 이태리어 같았다고 증언했다.

  주목할 것은 여섯 명의 청중이 같은 소리에 대해 각기 다른 반응을 보이고 있다는 점이다. 이것은 곧 문화적 배경이 서로 다른 독자가 하나의 텍스트(범인의 목소리)에 대해 자신들의 경험과 지식을 이용해 각기 다른 반응을 보이고 있는 것과도 같다. 얼핏 보면 증인들의 각기 다른 반응과 해석은, 의혹과 혼란을 초래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작품의 마지막에 이 단편의 주인공 듀팽 탐정은 신문에 보도된 여섯 명의 각기 다른 반응과 해석을 이용해 범인이 오랑우탄이라는 것을 밝혀낸다. 즉 듀팽 탐정은 이 여섯 사람의 반응으로 미루어 보아 범인은 인간이 아닐 것이라는 결론을 내릴 수 있었던 것이다. 사실 이 여섯 사람의 각기 다른 해석이 없었다면 듀팽은 결코 진실을 찾아내지 못했을 것이다. 그렇다면 '독자반응비평'은 무질서처럼 보이는 것 속에서 질서를 찾아내는 새로운 비평 이론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보면, 독자반응비평은 권위주의적인 저자에게 빼앗겼던 텍스트를 다시 독자에게 되찾아주는 역할을 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포의 또 다른 단편소설 『도둑맞은 편지The Purloinde Letter』도 독자반응비평의 역할을 은유적으로 보여주고 있는 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 이 단편에서 사악한 D. 장관은 고귀한 신분의 숙녀(왕비)로부터 그녀를 파멸시킬 수도 있는 연애편지 한 통을 훔친다. 파리 경시청 경찰국장은 왕비의 부탁으로 D. 장관의 숙소를 몰래 수색하지만 끝내 그 편지를 찾아내지 못한다. 그러나 파리 경찰국장의 부탁을 받은 듀팽 탐정은 눈이 나쁜 척, 안경을 쓰고 D. 장관을 방문하여 안심시킨 후, D. 장관이 그 편지를 모든 사람이 다 잘 볼 수 있는 벽난로 위의 편지걸이에 아무렇게나 꽂아 놓았다는 사실을 알아낸다. 다음 날 의도적으로 놓고 간 코담뱃갑을 핑계로 다시 D. 장관을 찾아간 듀팽은 자신의 부하가 창 밖에서 소란을 피우는 동안 미리 준비한 가짜 편지를 놓고 진짜 편지를 가지고 온다.

  이 이야기에서 편지는 독자가 저자에게 빼앗긴 텍스트를, 왕비는 그것을 되찾고 싶어 하는 독자를, D. 장관은 막강한 힘을 가진 저자를, 그리고 듀팽 탐정은 독자반응비평을 상징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그러한 맥락에서 이 단편을 다시 읽어 보면, 이 작품은 저자에게 빼앗긴 텍스트를 다시 빼앗아 독자에게 돌려주는 이야기라고도 볼 수 있다.

  중요한 것은 도둑맞은 편지를 다시 되찾는 방법이다. 그 편지는 감추어져 있지 않았으며, 모든 사람이 볼 수 있도록 아무렇게나 놓여 있었다. 듀팽 탐정이 편지를 바꿔칠 수 있었던 것도 밖에서 나는 시끄러운 소리에 D. 장관이 정신을 빼앗겼기 때문이었다. '밖'에서 들려온 이 고함소리는 듀팽 탐정이 시킨 것으로써, 텍스트를 되찾기 위한 독자반응비평의 다양하고 무질서한 고함소리에 비유해볼 수도 있을 것이다.

 

 

  5. 독자의 퇴장과 독자의 등장

  독자반응비평은 신비평가들이 주장했던 텍스트의 독립성과 자기 충족성을 부인하면서, 그리고 텍스트에 대한 독자의 반응이라는 주관적 비평을 인정하면서 등장했다. 그러므로 독자반응비평에서는 독자가 텍스트와 똑같이 중요한 존재이며, 문학적 의미와 해석의 요인이 된다. 텍스트의 해석에 있어서 독자의 역할이 중요시되자 몇 가지 본질적인 변화가 일어났다. 우선 저자의 권위가 추락하게 되었고, 책읽기가 글쓰기와 동등한 위치를 점유하게 되었으며, 독자가 곧 평론가가 되는 현상이 일어났다.

  1960년대에는 저자의 퇴장과 독자의 등장을 알리는 두 편의 기념비적인 글이 발표되는데, 하나는 롤랑 바르트의 「저자의 죽음」이고 다른 하나는 미셸 푸코의 「저자란 무엇인가?」이다. 바르트는 「저자의 죽음」에서 "고전적 비평은 독자에게는 아무런 관심도 기울이지 않았으며 저자만을 문학에서 유일한 인물로 취급했다. 우리는 저술의 미래를 위해서 이러한 신화가 깨뜨려져야만 한다는 것을 안다. 독자의 탄생은 저자의 죽음으로서만 가능하다"고 말했으며 푸코는 「저자란 무엇인가?」에서 "저자는 입법자가 아니다. 저자는 사라졌다. 우리는 이제 저자가 사라진 공백 상태를 재점검해야만 한다"고 말하고 있다.

  그러므로 독자반응비평은 저자의 퇴진과 독자의 부상을 선언했으며, 그동안 막강한 힘과 절대적인 권력을 갖고 있었던 저자와 텍스트에 대해 저항했던 새로운 독자중심 비평이론이었다. 그것은 또한, 저자로부터 영속적인 힘을 부여받았다고 여겨졌던 '내러티브'의 권위를 뿌리째 흔드는 진정한 포스트모던적 이론이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