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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예지 폐간 시대의 변화/ 장동석(張東碩)

검지 정숙자 2016. 5. 8. 20:44

 

  <특별기고> 

 

    문예지 폐간 시대의 변화

    -'우수문예지 발간 지원 사업' 폐지 이후

 

     장동석(張東碩)/ 출판평론가

 

 

 

  잡지(雜誌)의 시대가 서서히 저물고 있다. 신문이 생존을 위해 잡지의 전유물이었던 잡다한 것들을 앞다투어 다루면서 시작된 퇴조의 기운은, 인터넷 시대에 접어들면서 거스를 수 없는 물결이 되었다. 사람들의 손마다 스마트폰이 들려지면서 더더욱 잡지의 설 자리는 좁아졌다. 지하철을 타보면 단박에 알 수 있다. 주간지를 둘둘 말아 들고 다니는 사람들을 최근 본 적이 있는가. 책도 사라졌고, 무가지도 사라졌으며, 잡지는 더더욱 오래전 지하철에서 사라졌다. 20년 가까이 잡지를 만들며 살아온 사람이 할 소리는 아니지만, 좁아진 잡지의 자리는 가히 회복불능 상태라고 해도 틀린 말은 아니다.

 

 

  줄줄이 폐간된 문예지들

  문예지라고 상황이 나은 것은 아니다. 국내 유수의 문예지들이 줄줄이 경영난을 이유로 지난해 사실상 폐간되었다. 명목은 휴간, 부정기간행물로의 전환이라지만 언제 다시 복간할 것이며, 부정기의 기준은 또 얼마나 될는지 아무도 모르는 일이다. 그러니 장삼이사(張三李四)는 "사실상 폐간"이라는 말을 할 수밖에.

  가장 큰 사건은 아무래도 《세계의문학》이 40년 역사의 문을 닫은 일일 것이다. 《세계의문학》을 발행하는 민음사는 지난해 11월 말 2015년 겨울호를 끝으로 발행을 중단했다. 《세계의문학》이 어떤 문예지인가. 《창작과비평》,《문학과지성》과 함께 1970~1980년대 한국문학을 이끌었던 한 축 아니던가. 그런 잡지를, 그것도 민음사가 "계절마다 똑같은 형식의 문예지들이 수십 종씩 쏟아지는 상황에서 '세계의 문학'은 생명력을 다했다고 판단했다'며 발행을 중단했다. "내부적으로 새 이름의 차별화된 문학 콘텐츠를 구상 중"이라는 단서를 달았지만, 문예지 《세계의문학》의 자리를 대체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도 그럴 것이 '한국 문학의 세계화, 세계 문학의 한국화'를 모토로 숱한 해외 문학작품은 물론 새로운 작가를 소개했던 《세계의문학》이었다. 올해 하반기에 "새로운 형태의 문학장을 만들려고 한다"는 민음사 측의 말만을 믿어볼 뿐이다.

  25년간 100호를 발행한 계간 《솟대문학》의 폐간은 더 뼈아프다. "한국에 '장애문학'이라는 장르를 개척한 하나의 역사"라는 평가를 받았던 《솟대문학》은 장애인 문인들이 창작의욕을 불태울 수 있었던 거의 유일한 창구였다. 때문에 지원금 없이는 발행 자체가 어려웠다. 올해부터 한국문화예술위원회의 '우수 문예지 발간 지원 사업'이 폐지되면서 《솟대문학》은 그나마 명맥을 유지할 수 있는 기댈 언덕을 잃게 된 것이다.

  문단권력에 맞서는 새로운 대안을 모색하기 위해 창간되었던 계간 《소설문학》도 3년을 채우지 못하고 2015년 가을호를 마지막으로 잠정 휴간에 들어갔다. 향후 부정기간행물로 나온다고는 하지만, 언제 어떻게 다시 발행될지는 미지수다. 시 전문 월간지 《유심》도 문을 닫았다. 《유심》은 1918년 만해 한용운이 주도해 창간되었지만 3호를 넘기지 못했었다. 다행히 200180년 만에 계간으로 복간되었고 이어 격월간, 월간으로 발행 주기를 좁혔지만, 끝내 종간의 길을 가게 되었다. 불교적 색채가 강하면서도 다양한 종교를 포용하며, 시인들에게 창작의 공간을 내주었던 《유심》의 부재는 실로 크다고 할 수 있다.

  지난해 유독 두드러졌지만, 문예지들은 그간 소리 없이 우리 곁을 떠났다. 2005년부터는 《당대비평》이 보이지 않았고, 2008년에는 《사회비평》이 자취를 감췄다. 2006년 가을호로 복간되면서 화가 황주리의 의미심장한 그림들로 표지를 단장했던 《비평》은 2009년 여름호를 끝으로 무기한 정간에 들어갔다. 정간, 휴간 등의 이름을 사용했지만 사실상 폐간이었다.

 

 

  경쟁자들에게 밀린 문예지들의 현실

  문예지들이 명맥 유지조차 힘들어진 이유는 불거리와 놀 거리로 충만한 세상이 도래했기 때문이다. 인터넷 시대, 세상은 이제 구석구석이 연결되어 있다. 세상은 모든 사람들의 손바닥 안에서 세상 온갖 일들이 검색되고, 연결되는 사회이다. 이른바 초연결사회다. 하지만 스마트폰이나 인터넷까지 갈 필요도 없다. 쇠락하고 있는 또 하나의 매체인 신문은 오래전부터 잡지가 되고 싶어 했다. 책, 여행, 증권, 부동산 등 다양한 콘텐츠들이 신문 주말판을 장식한다. 주중이라고 덜하지도 않다. 신문은 이제 잡지에서 다루던 온갖 콘텐츠를 담아내고 있다. 그렇게라도 새롭게 일어서면 모를까, 신문의 상황은 나아지지 않고 있다. 신문 외에도 잡지 콘텐츠를 탐내는 매체는 많고 많다. 몇 년 전 한 잡지에 썼던 잡지의 쇠락 이유에 관한 글 중 한 대목이다.

 

 

  "내친김에 잡지가 그간 강점이라고 내세웠던 심도 깊은 내용에 대해서도 한마디하자. 잡지는 신문이나 TV 등 속보경쟁에 목숨 거는 매체와는 달리 심층적인 내용과 분석을 제 역할이라고 오랫동안 강조해 왔다. 그 예날 《사상계》나 《기독교사상》,《뿌리깊은나무》같은 잡지들을 독자들이 사랑했던 이유는 심층적인 내용 분석을 통해 잡지의 진짜 역할, 즉 세상 보는 눈을 정확하게 제시했기 때문이다. 지금은 어떤가. 일단 폭발적으로 증가한 지식의 양 때문에 어떤 것이 진짜 지식인지 알 수가 없을 지경이다. '진짜' 인문학자 김용규 선생은 《생각의 시대》에서 2030년이면 "지식이 3일마다 2배씩" 늘어날 것이라고 예측했다. 굳이 2030년까지 갈 일이 있을까. 지금 세상의 지식은 정보의 바다(혹은 쓰레기의 바다) 인터넷을 통해 나날이 증가하고 있다. 나날이 증가하는 지식 사이에서 잡지는 진짜 지식을 분별할 수 있는 눈을 갖추고 있는가. 15년 넘게 잡지를 만들고 있는 처지지만 나 스스로에게 '그렇다'고 자신 있게 대답할 수 없는 상황이다. 대개의 잡지쟁이들이 또한 내 마음과 같지 않지 않을까."

 

 

  인터넷을 기반으로 한 다양한 매체의 발전이 가져온 결과이기도 하지만 잡지, 좁혀서는 문예지들이 사라지는 결정적인 이유는 결국 '돈'이다. 높고 곧은 뜻에 따라 만들어졌다 해도, 계속 발행되기 위해서는 결국 재정적 뒷받침이 필요하다. 정기구독 독자가 많거나 광고가 심심치 않게 지면을 채워준다면 좋다. 하지만 40년 역사를 자랑했던 《세계의문학》의 마지막 시점에 정기구독자는 30여 명이었다고 한다. 다른 문예지들은 말해 뭐할까. 광고라도 많았으면 좋았을 것을, 대개의 문예지들은 자사 광고로 지면을 채우는 게 비일비재했다. 정기구독과 광고, 두 가지 측면에서 본다면 그간 버텨준 것만으로도 문예지는 제 역할을 다했다고 할 수도 있다.

  정기구독이나 광고로는 채울 수 없는 재정을 채우는 방식 중 하나가 지원금이다. 대표적인 것이 바로 한국문화예술위원회의 '우수 문예지 발간 지원 사업'이었다. 하지만 이 사업은 올해부터 폐지되었다. 2014년까지만 해도 55개 문예지에 10억 원이 지원되었지만 2015년에는 대폭 삭감되어 14곳, 3억 원만 지원되었다. 올해부터는 그마저도 없는데, 공고도 없이 지원 사업이 종료되었다. 문예지를 발행하는 일 자체를 '지원 사업'에 의지해서 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하지만 그럴 수밖에 없는 문예지들이 있다. 《솟대문학》이 대표적이다. 우리 사회의 약자인 장애인들의 이야기에 귀 기울이는 사람들은 실로 적다. 그런 가운데 '문학'이라는 창구를 통해 장애인들의 삶을 발현했던 문예지가 《솟대문학》이다. 한국장애예술인협회 홈페이지(www.emiji.net) '솟대문학' 코너는 열려 있다고는 하지만, 이전과 같은 창작열이 발현될지, 그리고 독자들의 관심이 이어질지는 모를 일이다.

    한국문화예술위원회의 '우수 문예지 발간 지원 사업'을 폐지하면서 '아르코문학창작지원금'도 축소해 빈축을 사고 있다. "단순한 재정지원 방식의 사업이 오히려 문학적 성과와는 무관하게 작가나 단체들을 기금지원에만 의존하게 하고 독자를 비롯한 시장 개발에는 관심을 멀게 한다는 판단에 따른 것"이라고 배경을 설명했지만, 이는 말로만 문화 융성을 부르짖는 이 정부의 무능과 대안 없음을 보여주는 극적인 사례라고 할 수 있다. 한국문화예술위원회는 우수 문예지 발간 지원 사업을 '콘텐츠 아카이빙' 사업, 즉 30여 개 문예지를 온라인 기록물로 남기는 일을 추진 중이다. 문제는 20177억 원의 예산을 올해는 2억 원으로 줄였단 점이다. 정책적 의지가 없다는 반증이다.

 

 

  문예지를 대하는 지성사회의 인식 변화 필요

  현재로서는 문예지의 위기를 타개할 수있는 별다른 묘수가 없는 듯 보인다. 매체의 다양화 혹은 인터넷 기반 매체로의 획일화에 따른 대중의 변화는 문예지들이 도저히 따라갈 수가 없는 경지에 올랐다. 문예지는 속성상 눈높이를 낮출 수 없다. 비판적으로 보자면 문예지의 글은 사회와 대중과 소통하지 못하는 글쓰기에 사로잡힌 식자들의 고담준론(高談峻論)이 난무하는 글이다. 이런 글들이 의미가 없다는 말이 아니다. 고담준론이 담긴 글들이 사회적 담론을 형성하고, 세상이 나아가야 할 길을 제시하기도 한다. 다만 연예인들의 신변잡기에 더 관심이 많은 요즘 세태, 특히 젊은 세대에게는 구미가 당기는 글이 아닌 것만은 분명하다. 반대 측면도 있다. 대중에게는 '너무 어렵다'며 외면하지만 식자층에게는 '다 아는 이야기'라고 외면을 받는다. 이를 테면 사면초가(四面楚歌)의 상황이랄까. 

  방법이 없는 것은 아니다. 문예지를 발간하는 출판사의 노력도 필요하고, 대중 독자의 관심도 중요하다. 정부의 '종합적인'까지는 아니어도 일정 부분 지원이 절실하다. 그러나 이보다 더 중요한 것은 문예지에 대한 지성 사회의 인식 변화다. 문예지는 단지 문학 관련 글만이 게재되지 않는다. 정치, 사회, 문화 등의 영역에서 학문의 사회적 의미를 찾아가는 글들이 문예지의 처음부터 끝을 장식한다. 200511월 《교수신문》은 <기획연재-21C 한국 지식인들의 자화상>을 다루면서 첫 번째 연재로 '무크' 계간지들의 몰락'을 다뤘다. 그 글은 "이런 현상(계간지의 몰락)을 문제시하고 설명하려는 지식인들의 노력이 보이지 않는다"고 질타하고 있다. 해당 출판사의 경영난, 매체의 변화, 정부 지원 부재 등이 어려움의 진짜 이유가 아니라 한국 지식인들의 의제 설정 능력이 낙제점이라는 것이다.

  실제로 1990년대로 들어서면서부터 문예지들은 소수 학자, 교수, 평론가들의 '그들만의 리그'라는 비판을 받아왔다. 세계 3대 진보저널인 미국의 《먼슬리 리뷰》와 영국의 《뉴 레프트 리뷰》, 프랑스의 《르몽드 디플로마티크》등은 당대 지식인과 지성인들의 견인으로 지금도 건재하다. 세계적 권위의 독일 막스플랑크연구소는 계간지 《막스플랑크포슝》을 발행한다. 막스플랑크연구소는 이 계간지를 기반으로 성장한 학자들이 각종 노벨상을 서른 네 번 넘게 수상하면서 독일의 학문 요람으로 자리매김했다. 과문하여 감히 문예지의 나아갈 길은 제시할 수 없다. 다만, 문예지가 점차 외면 받고 있는 현실을 따라가다 보면, 몇 가지 시사점은 얻을 수 있으리라 믿는다. ▩

 

 

   *『문학사상』2016-5월호 <특별기고>

   * 장동석(張東碩)/ 출판평론가,기획회의》편집주간, 저서《살아있는 도서관》《금서의 재탄생》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