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의 문학을 바라보다 | 일본문학>
'단편의 명수' 아쿠타가와 류노스케
김명주 / 경상대학교 일어교육과 교수
1
아쿠타가와 류노스케(芥川龍之介, 1892~1927), 그는 우리에게 제법 알려진 작가이다. 작품을 읽었다는 사람들을 적잖이 만나니 말이다. 주로 「코(鼻)」나 「지옥변(地獄變)」과 같은 단편이나 「거미줄(蜘蛛の糸)」과 같은 동화들을 들어 필력에 찬사를 아끼지 않는다. 또 아쿠타가와 상을 언급하는 사람도 있다. 그는 일본에서 권위 있는 순수문학상의 타이틀이 되어 있는 것이다.
간혹 이상(1910~1937)이 동경하던 작가라는 것까지 알고 있는 사람도 있다. 사실 우리나라의 일본문학계나 국문학계에서 이상 문학과의 비교 연구는 상당히 진행되어 있다. 주로 「날개」「종생기(終生記」등과 아쿠타가와의 「톱니바퀴(齒車)」「어떤 바보의 일생(或阿保の一生)」등과의 상호텍스트성이 논해지고, 「날개」의 모두 부분의 '박제된 천재를 아시오!'의 천재가 아쿠타가와라는 것이 정설로 되어 있다.
또 몇 년 전부터 우리나라에서는 아쿠타가와 연구자들 20여 명이 모여 전집 번역 작업에 착수하여 이미 6권이 간행되었고 곧 완역될 계획이어서 독자층은 더욱 확대될 것으로 보인다.
이런저런 이유로 정작 일본인들조차 놀랄 만큼 우리에게는 친숙한 셈이지만, 일본 근대문학가 중에서는 의외로 세계에 일찍 소개된 작가이기도 한다. 노벨문학상 수상자 가와바타 야스나리(川端康成, 1899~1972)나 국민 대작가 나쓰메 소세키(夏目漱石, 1867~1916) 정도는 아니지만 세계인에게 사랑을 받아 왔다.
2
일본에서 부르는 명칭은 다양하다. 근대문학의 챔피언, 다이쇼기(大正期, 1912~1926)의 귀재, 이지파, 신현실주의, 신기교파, 신사조파, 비유의 문학, 소세키의 수제자, 단편의 명수, 뛰어난 스토리텔러 등이 그것이다.
그 중 먼저 본인은 별로 달가워하지 않을 테지만, '소세키의 제자'라는 명찰에 대해서 소개하고자 한다. 그는 원래 도쿄대학 영문과를 수석 입학하여 공부에 매진하였고 작가가 될 의향은 없었다고 한다. 하지만 훗날 신사조(新思潮)파 동인으로 같이 활동하개 되는 교우 구메 마사오(久米正雄, 1891~1952)의 권유로 창작을 시작하였고, 그 첫 작품이 「나생문」이며 다음이 「코」이다. 그런데 「코」를 읽은 소세키는 다음과 같은 편지를 그에게 보낸다.
당신 작품은 대단히 흥미롭게 여겨집니다. 차분히 안정되어 있으며 어설픈 흉내를 내지 않고, 자연 그대로의 골계미가 유유히 표출되어 있는 점이 품격이 있습니다. 그리고 제재가 대단히 새로운 것이 눈에 띕니다. 문장이 요령을 얻어 잘 됭돈되어 있는 것도 놀라웠습니다. 그러한 것을 이제부터 2, 30편 이어가 보세요. 문단에서 비할 바 없는 작가가 될 것입니다.
이리하여 무명의 청년작가는 습작기도 없이 화려하게 데뷔를 한다. 한편 소세키의 이 거나한 상찬 소식에 자연주의 측 비평가들은 작품을 읽어 보지만 무척이나 실망했다고 한다. 자연주의 전성시대에 반자연주의자를 자처하던 소세키의 수제자로서 자연주의와의 투쟁이 시작된 것이다.
그런데 소세키는 '제재가 새롭다'고 하고 있다. 「코」를 비롯한 여타의 작품들이 독창이 아니라고 한다면 우리 독자들은 충격을 받을 것이다. 표절 시비에도 걸릴 것 같기도 한다. 하물며 런던 유학과 도쿄대 영문과 교수라는 이력이 무색하리만큼 한문학에 밝고 동서양 고전을 섭렵한 독서가 소세키가 지금은 국민교양도서가 된 고설화집 『곤자쿠모노가타리(今昔物語)』나 『우지슈이모노가타리(宇治拾遺物語)』조차 알지 못했다는 것은 아이러니로 비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들은 당시 전문가가 아니면 쉽게 접할 수 없던 서적으로 생긴 헤프닝으로 보면 될 것이고, 한 작가를 탄생시킨 계기가 되었다는 점에서 뜻깊은 사건이다.
다음으로 아쿠타가와 문학을 대변할 가장 적확한 이름은 '단편의 명수' 혹은 '뛰어난 스토리텔러'라는 것이다. 그런데 그는 자살 직전 탐미파의 거장 다니자키 준이치로(谷崎潤一郞, 1886~1965)와 논쟁을 벌였다. 훗날 소위 '줄거리(플롯)논쟁'이라 불리는 것으로, '이야기다운 이야기가 있는 소설(話らしい話のれい小説)이라는 키워드를 제시하고, 자신의 종전의 문학을 '이야기다운 이야기가 있는 소설'로 부정하며 동류의 다니자키 문학을 비판하였다. 또 그와 함께 '시적 정신(詩的精神)'이란 다소 난해한 키워드를 제시하고, 그것을 서사적 글쓰기의 본질로 역설하고는 '소설의 신'으로 불리는 시가 나오야(志賀直哉, 1883~1971)의 작품을 샘플로 들어 경의를 표했다.
이에 다니자키는 '시적 정신'이란 이해하기 어렵지만 '이야기'란 "줄거리의 흥미로움, 환언하면 구성하는 힘, 구조의 흥미로운 건축적 아름다움"이라고 '구조의 미관'을 들어 응수하였고, 또 이야기가 있던 그의 예전의 소설이 훨씬 낫다고 일침을 가했다. 그리하여 이 논쟁은 자살 직전 신경증으로 다소 논리가 튀고 좌고우면하던 아쿠타가와의 패배처럼 받아들여졌다.
이는 당시의 일본 문단을 대변하는 사건이기도 하다. 메이지(明治, 1868~1912)로부터 시작된 일본의 근대 문단은 독특한 자연주의가 왕좌를 차지하고 있었다. 현실을 있는 그대로 쓰는 것, 작가의 내밀한 삶을 노골적으로 폭로하는 것, 그러한 글쓰기의 방법이 '진실성의 미학'이라는 미명 하에 추구되고 있었다. 그것은 사소설(私小說)이란 형태로 구체화되어 갔는데, 이는 일본 고유의 독특한 형태로, 독일의 '이히 로망' 즉 1인칭 소설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한편 자연주의와 날카롭게 대립하던 시라카바파(白樺派, 인도주의) 역시 에세이풍의 자기 고백적 소설을 쓰고 있었는데 이는 심경소설(心境小說)로 명명되고 대표 작가로는 시가를 들 수 있으며, 이러한 사소설과 심경소설은 평론가 히라노 겐(平野謙)에 의해 '파멸형'과 '조화형'으로 정의되어 있다.
거듭 말하지만 아쿠타가와는 자연주의 식의 사소설을 싫어했지만 시가에 대해서는 이상하리만큼 경외심을 가지고 있었고, 만년에는 시가류의 글쓰기를 통하여 자신을 고백하기 시작하였다. 물론 이러한 작품 변화에 대해서는 평이 엇갈리며, 10여 년의 짧은 작가생활 속에서 장편은 단 한 편도 쓰지 못하고 140영 편에 이르는 단편만을 남기고 있고, 대체로 알려진 작품들이 고설화에서 제재를 취한 '이야기다운 이야가 있는' 단편들인 점을 감안할 때 '단편의 명수'이자 '뛰어난 스토리텔러'라는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그러나 만년 '이야기다운 이야기가 없는 소설'을 추구하다가 죽어간 그를 생각하면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겠지만, 새로이 소설 장르가 주목되고 프로이드의 무의식이 소개되고 모더니즘 물결이 도래하던 과도기적 시대 속에서 서사적 글쓰기의 방법에 대해 누구보다 치열하게 고민하던 아쿠타가와의 모습을 생생히 만나볼 수 있다.
3
아쿠타가와 문학에는 사상이 없다는 말을 종종 듣는다. 사상적 전개를 발견할 수 없다는 말이다. '비평의 신'이라 불리는 고바야시 히데오(小林秀雄, 1902~1983)가 '이지적 작가는 아니고 신경밖에 가지고 있지 않다.' '개성이 인격이 되는 것을 포기하고 하나의 현상으로밖에 남지 않았다.'라는 아쿠타가와에 대한 감각적 평으로 데뷔한 것은 그렇지만, 같은 동인이었던 기쿠치 간(菊池寛, 1888~1948)조차 '인생을 은핀셋으로 가지고 놀았다'라는 평도 화제가 되어 있다. 극히 사소하며 기교적이라는 말이리라. 그러면 과연 그의 문학이 그토록 쇄말하고, 하나의 현상에 지나지 않은 것이었는지 문학적 도정을 짚어가며 소개해 보고자 한다.
아쿠타가와는 도쿄의 중류가정에서 태어났다. 소위 엘리트 코스로 불렸던 제일고등학교와 도쿄대학을 거쳐, 해군기관학교에서 영어교사를 하다가 창작에 전념하기 위하여 오사카매일신문의 전속작가로 계약을 한다. 그러나 생후 8개월 만에 친모가 정신분열을 일으켜 외가에 양자로 들어가게 된 출생의 비밀이나 또 그 탓에 친가와 외가를 모두 부양할 수밖에 없었던 가장으로서의 중압감이 신경을 옥죄고 있었는데, 이 같은 애달픈 인간 아쿠타가와도 음화(陰畵)로써 남아있다.
그의 문학은 흔히 3기로 구분된다. 전기는 '이야기다운 이야기가 있는 소설'의 시기이며, 중기는 현대물이 뒤섞이는 과도기적 세계이며, 후기는 주로 자기고백적 작품을 쓰던 시기이다. 이것들은 서술적 양상에 불과하지만, 사상적 도정 또한 그 전개상과 맞물려 변용되고 있다. 「어떤 바보의 일생」(유고)에서는 20세부터 36세까지의 정신적 자화상이 스케치되어 있는데, 그 서장에서는 풋풋한 스무 살의 젊은 청년의 모습이 소묘된다.
그것은 어느 서점 2층이었다. 스무 살의 그는 서가에 걸친 서양풍 사다리를 올라가, 새 책을 찾고 있었다. 모파상, 보들레르, 스트린드베리, 입센, 쇼, 톨스토이…….
그런 중에 날이 저물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는 열심히 책등 글자를 읽기 시작했다. 거기에 진열되어 있는 것은 책이라기보다도 오히려 세기말 그 자체였다. 니체, 베를렌, 공쿠르 형제, 도스토예프스키, 하우프트만, 플로베르……. (중략) 그는 사다리 위에 멈춰선 채, 책 사이로 움직이고 있는 점원이나 손님을 내려다보았다. 그들은 묘하게 작았다. 뿐만 아니라 너무나도 보잘 것 없었다. "내 인생은 한 줄의 보들레르에도 미치지 못한다."(1장 시대)
이 사다리는 일명 '세기말 사상'이란 사다리이다. 다른 근대 지식인들이 그러하듯이 자신 역시 서구 세기말 사상의 세례를 받고 문학적 인생을 출발했다는 것이다. 한때는 '정신적으로 위대한 자가 되고 싶다'던, '그 시절에는 스스로를 신으로 삼고 싶던 한 사람이었다'던 오만한 청년에게 인생이란 하등하고 보잘 것 없었으며 '한 줄의 보들레르에도 미치지 못하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거칠 것 없는 고등한 정신세계를 추구하게 되는데, 그것은 몇몇의 예술지상주의 작품에서 표출되어 있다.
사견으로 그러한 단선적인 전기의 문학을 장밋빛 '새벽의 문학'이라 부른다. 그러나 곧 그러한 문학을 '인공의 날개' 즉 '이카로스의 날개'에 비유하게 된다. 그러한 중기를 '황혼의 문학'으로 부르며, 나아가 죽음을 마주하고 촉수처럼 가늘게 뻗쳐진 신경을 제어하지 못하고 회한과 절망으로 무너져 내리던 후기를 '어둠의 문학'으로 정의하고자 한다.
그러나 아쿠타가와 문학이 주지하는 대로 '어둠의 문학'으로 완성되었다고 간단히 차치해 버리기에는 아쉬움이 남는다. 다음은 죽기 몇 개월 전 쓴 「서방의 사람」의 결미 부분이다.
하지만 그리스도의 일생은 언제나 우리를 움직일 것이다. 그것은 천상에서 지상으로 오르기 위해 무참히도 부러진 사다리이다. 어두컴컴한 하늘로부터 억수같이 내리 퍼붓는 빗속에 기울어진 채로……. (정편 36)
이 문장을 두고 오기설, 정합설로 해석이 갈리어 논의가 과열되어 있다. '나의 그리스도론'이라는 이 에세이 속에서 아쿠타가와는 예수를 시인, 저널리스트, 로맨티스트로, 성령과 마리아는 각각 '영원히 지키려는 것(永遠に守ろうとするの)', '영원히 넘어서려는 것(永遠に超えんとするの)'으로 정의하여, 그리스도를 그 사이에서 찢기는 존재로 보았다. 오기론은 죽기 직전 불면증으로 수면제를 상시 복용한 탓에 생긴 것이라는 입장이지만, 사견으로는 정합하다고 본다. 천상이란 '예술적 자아', 지상이란 '생활적 자아'로 환언해 볼 수 있으며, 따라서 위의 문장은 '예술적 자아'에서 '생활적 자아'로의 지향성을 역설하는 표현이라고 본다.
또 이와 동시적으로 쓰인 문학론 「문예적인 너무나 문예적인」에서 아쿠타가와는 전술한 '시적 정신'에 몰두하고 있었는데, 그것은 바로 성령, 즉 '영원히 넘어서려는 것'으로서의 '예술적 자아'로 환언해 볼 수 있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가없이 펼쳐지는 무변의 의식의 세계, 그 피안의 언어가 아닌 지상의 언어로 독자들에게 전달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 작가라는 것이며, 또 그리스도가 듣는 귀가 없는 자들을 위해 비유를 사용하였듯이, 문학이 소설이 그러하다는 것이다. 젊은 고바야시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생을 가장 절실하게 하는 항구적인 실질이 없는 것으로 보였던 산문이 그의 숙명으로 보였고 인생을 절실하게 살지 않지만 가장 생명의 긴 실질을 가진 것으로 보인 서정시가 그의 미신으로 보였다,"라고 '시적 정신'에 대해서는 이해하고 있어서 주목된다.
1927년 7월 24일 자살 당일의 도쿄는 무더웠고, 2층 서재에서는 새벽까지 집필이 계속되었다.깊은 고요 속에서 만년필 뚜껑이 닫히고 원고는 평생 자신을 돌봐왔던 외백모에게 맡겨졌다. 그리고 1층 침실로 내려온 그는 다량의 수면제를 복용하고 자고 있던 부인 옆에서 조용히 숨을 거뒀다. 만 36세로 아들 셋과 그를 양육했던 미워할 수 없는 복수의 노인들이 남겨져 있었다. 이 지상에서 쓴 마지막 문장은 「속 서방의 사람」으로 결미를 다음과 같이 맺고 있다.
우리들은 엠마오로 가는 나그네들처럼 우리 마음을 타오르게 하는 그리스도를 찾지 않고서는 견딜 수 없다.(속편 22)
누가복음의 '엠마오로 가는 두 제자'를 빌어 자신의 문학과 인생을 총정리한 것이다. 앞서의 폭풍우가 내리치는 공중에서 이제라도 무너져 내릴 듯이 거꾸로 매달려 있던 부러진 사다리란 바로 통절한 예술가로서의 존재방식의 비유가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그는 십자가에 달리기 위해 저널리즘 지상주의를 세우기 위해 모든 것을 희생"(속편 22)했듯이 '나의 그리스도론'의 조형과 함께 자신의 문학을 완성할 수 있었던 것이다.
다시 말하면 '시적 정신'의 실체를 대면하고 죽음을 이의 없이 받아들였을 것이며, 그 순간 절망에 찬 어둠의 의식이 돌파되고 '빛의 의식'으로 전환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마치 예수 그리스도가 십자가의 고통을 감내하고 부활하였듯이, 그 역시 부활을 꿈꾸며 죽음을 하나의 의식(儀式)으로 행하고 있었던 것이다.
머리맡에 성경을 둔 채 영원한 잠으로 빠져들어 갔지만 그는 정작 기독교인은 아니다. 당시 청년들이나 지식인들이 서양을 이해하기 위해 성경을 교양 필독서로 끼고 다녔듯이 성경체험은 그런 범주에 지나지 않았으며, '나의 그리스도론' 조형을 위해 성경을 다시 붙들고 정독한 것이다. 또 '실크헷을 쓴 천사'로 비유되는 전도자 무로가 후미다케(室賀文武)를 종종 만나 특히 십자가 사건에 대해 깊은 대화를 나눴으며, 무로가는 부활의 그리스도를 뜨겁게 전한 것으로 전해지지만, 종교적 차원에서 구세주를 만난 것이 아님은 분명하다.
그 후 10년쯤 지나 마키노 신이치(牧野信一, 1896~1936)가 죽었다. 일간에서는 일제히 아쿠타가와의 죽음이 회고되었다. 우리나라에서는 아쿠타가와를 동경해 마지않던 이상이 또 마키노의 죽음이 부럽다고 중얼거리며 도쿄로 건너갔다. 그리고 이듬해 죽었다. 그리고 전술한 이상 문학과 상호텍스트성이 논해지는 작품들이 '이야기다운 이야기가 없는 소설'이라는 점은 매우 시사적이다. 이상은 모두가 어려워하는 그 '시적 정신'을 발견하고 공명하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엠마오로 가는 두 제자들'처럼.
다이쇼라는 하나의 시대가 끝나고 쇼와(昭和, 1926~1989) 개원에 일어난 아쿠타가와의 죽음은 다이쇼 문단의 스캔들이자 시대적 죽음으로 해석되기도 했으며, 프롤레타리아 전성기에 뿌띠 부르주아 작가의 '패배의 문학'이라는 판정이 붙여지기도 했다. 주지하는 대로 일본 문학자 중에는 자살자가 많다는 것도 하나의 특징적 양상이 되고 있다. 기타무라 도코쿠(北村透谷, 1868~1894), 아쿠타가와, 마키노, 디자이 오사무(太宰治, 1909∼1948), 미시마 유키오(三島由紀夫, 1925~1970), 가와바타에 이르기까지 계보가 한없이 이어져오고 있다. 이를 두고 일본 고유의 문화적 풍토 속에서 이유를 찾으려는 시도도 있어 왔지만 그들은 제각기 다른 이유와 방식으로 죽어갔다. 적어도 아쿠타가와는 스스로의 '저널리즘을 완성시키기 위하여', '시적 정신'의 구현을 위하여 죽어 간 것이라 말할 수 있다. ▩
----------------------
*『月刊文學』2016-5월호 <세계문학을 바라보다|일본문학>
* 김명주/ 경상대학교 일어교육과 교수
'여러 파트의 글' 카테고리의 다른 글
역사 속을 걸어온 큰 작가 신봉승/ 마지막 인터뷰 (0) | 2016.06.02 |
---|---|
독자반응비평/ 김성곤(金聖坤) (0) | 2016.05.20 |
문예지 폐간 시대의 변화/ 장동석(張東碩) (0) | 2016.05.08 |
재레드 다이아몬드 교수_ 유발 하라리 교수 특별 대담 (0) | 2016.05.01 |
탈구조주의/ 김성곤(金聖坤) (0) | 2016.04.24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