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세이 한 편

글자 한 자 차이/ 정인호

검지 정숙자 2016. 5. 14. 01:53

 

 

    글자 한 자 차이

 

     정인호

 

 

  가슴이 설렌다. 내 할아버지의 행적을 후손인 내 손으로 자랑하려니 그럴 수밖에! 어떻게 하면 고려시대를 살았던 동래정씨(東萊鄭氏) 5세, 호 과정(瓜亭), 휘 정서(鄭敍) 선조에 관해 자세히 말씀드릴까 고민한다.

  그 어른은 나의 방조(傍祖)이시다. 불후의 문학작품인 「정과정곡(鄭瓜亭曲」을 지어 남기셨고, 부산 최초의 시인이라고 하는 이가 많다. 이미 드러난 것을 새삼스럽게 앞세우기 전에 그 어른의 따뜻한 체온이 남아 있는 '정과정(鄭瓜亭)'에 관해 말해 보려 한다. 그 정자는 부산 수영강변에 있다. 서울 한강변 문신 한명회의 압구정(狎鷗亭)에 견준다면 이해가 빠르지 싶다.

  우선 두 건축물은 서로 성격이 판이하게 다르다. 하지만 그 명성만큼은 현세까지도 바래지 않고 면면히 이어진다. 정과정은 고려가요 「정과정곡」의 창시자로 이름이 나 있고, 사람들로부터 존숭받는 명소였다. 반면 압구정은 로데오거리로 유명한 서울 강남구 압구정동으로 부와 권력을 상징했으니 얼마나 떵떵거렸는지 짐작된다.

  초창기 정과정은 오이밭에 지은 원두막 형태였다고 한다. 그러나 압구정은 한명회가 조정에서 한창 잘 나갈 때 직접 지어 호화별장에 가깝고 주위에 권세가문과 양반 별장이 몰려 있었다. 그 후 한명회는 시신이 무덤에서 꺼내져 부관참시를 당했다는 역사가 있었음이 다르다.

  정과정 공(公)은 고려 인종 임금과 동서지간이었다. 한명회의 두 딸은 조선 예종과 성종 왕비였는데 두 분 다 당대 임금과 친인척이었다. 자세히 들여다보면 정자 위치가 그렇고 사람도 그렇고 인과관계도 판이하게 달라 보인다.

  '동래鄭씨' 문중족보를 보면 정과정 공은 대를 잇는 후사가 없었다. 이는 고려시대에 양자 제도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직계 후손은 없지만 해마다 동지가 되면 수많은 종인들이 화지공원에 있는 사당에 모여 엄숙한 분위기에서 제사를 지낸다. 그뿐 아니다. 2003년 부산광역시에서 지극한 마음으로 막대한 예산과 토지를 제공하여 정과정 유적지를 복원하고 부산시 기념물 제54호로 지정한 것만 보아도 부산시민은 모름지기 그 후손을 자처한다는 증거가 아니겠는가.

 

 

  정과정(鄭瓜亭) : 부산 수영구 망미동에 있는 '정서'의 정자

  화지공원 : 부산진구 양정동에 있는 동래정씨 문중 사유지인데

  시조묘소와 사당이 있고 약 11만 평이나 된다.

  정과정유적지 : 부산 수영구 망미동에 위히차는데, 부산시에서 정과정(鄭瓜亭)을 새로 지어 공원으로 만들어 직접 관리하고 있다.

 

 

  역사의 흔적만 남았던 정과정이 이렇게 다시 태어나 아담한 팔각정에 까만 기와를 얹었다. 정과정 공이 20여 년간 유배생활을 하는 동안 개성을 바라보고 님을 그렸다는, 집채보다 큰 바위인 경암(鏡巖)도 경성대학교 김무조 박사가 옮겨왔다. 간신배의 모함을 받아 유배생활을 하고도 끝내 복원되지 못했음에도 절절하고 깊은 충성심이 교훈적이지 않은가. 예부터 정과정을 구경하러 멀리 한양과 호남에서 찾아오는 선비가 적지 않았고 어느 유적지에 비해 웅장하지 않지만 한국 가사문학의 요람이 바로 정과정이라고 지칭하는 것이었다.

  내가 고등학교 다닐 때 달달 외워야 했던 「정과정곡」은 '내 님이 그리워 우나니/ 산 접동새와 난 비슷하요이다.'라고 시작한다. 요즘도 해마다 대학 시험문제로 나온다니 이 얼마나 자랑스러운 우리 가문의 영광인가. 무엇보다 지은이가 알려진 유일한 고려시대 문학작품이라 국보급이라고 배웠지만, 나의 조상인 줄을 몰랐던 그때는 너무나 철부지였다.

  그런데도 어느 하루는 서울에 사는 친구가 시커먼 안경을 끼고 나를 찾아와 부산에도 내세울 만한 문화가 있나? 라고 거듭 거들먹거렸다. 고기잡이로 연명하던 갯가에는 예부터 비천한 사람들이 살았다며 깔보는 말을 내뱉었다. 하지만「정과정곡」의 산실이요 부산 최초의 시인이 남긴 유적지가 바로 정과정이란 것을 모르고 말한 실수였다, 제대로 알려야겠다고 작정하고 부산문화의 깊이를 설명하고 나니 그제야 내 손을  잡고는 민망한 표정을 지었다.

  예나 지금이나 부와 권력을 내세우는 데가 서울 압구정동이라 했다. 하지만 드러내어 자랑하지 않는 명소가 바로 정과정이 아니겠는가. 몇 해 전부터 동래정씨 문중에서 막대한 예산으로 '정과정문학상'을 시상한다. 나는 수상자를 성정하는 위원의 한 사람이다. 실력은 형펀없으면서 상금만 노리는 얌체 문인을 골라내는 책임자라는 사실이 자랑스럽다.

  '중이 제 머리 못 깎는다,'라는 속담이 틀린 말은 아니다. 그러나 시대가 변했다. 한 시대를 풍미했던 자랑스러운 내 조상을 알리는 일이 자손의 임무이기에 시대에 걸맞게 내 머리를 내가 깎아도 되지 않겠는가. 자랑거리가 있고 없고는 글자 한 자 차이이겠지만 이렇게 자랑을 늘어놓고 나니 왜 이리 가슴이 쿵덕거리는지 모를 일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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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月刊文學』2016-5월호 <수필>에서

   * 정인호/ 2001년 『현대수필』등단, 수필집 『꽃을 든 남자』등. 허균문학상, 정과정문학상 수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