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세이 한 편

할미꽃/ 송정연

검지 정숙자 2016. 3. 21. 01:58

 

 

    할미꽃

 

    송정연

 

 

  내가 손자를 돌본 지 벌써 여섯 해가 되었다.

  딸은 아침에 출근하며 '이 시기엔 예의범절을 가르쳐야 한다.'며 전래동화를 읽어주란다. 매일 읽는 몇 권의 책 중 오늘은 「할미꽃」을 읽어줄 차례다.

  '홀어머니가 못된 첫째 딸과 둘째 딸, 착한 셋째 딸과 가난하게 살았단다. 어느덧 어머니의 얼굴에 굵은 주름이 파였고 허리는 동그랗게 굽었다. 추운 겨울날 어머니는 딸들이 보고 싶어 집을 나섰다. 첫째와 둘째 집으로 가니 딸들은 어머니를 쌀쌀맞게 대했다. 겨우 물 한 모금 마시고 힘없이 나온 어머니는 비틀거리며 "첫째와 둘째를 보았으니 이제 막내를 보러 가야지"하며 지팡이에 몸을 의지하여 세 번째 고개를 넘기 시작했다. 눈길에 미끄러지고 돌부리에 채이며 걷다 보니 어느새 해가 지고 날이 어두웠다. 드디어 저 멀리 셋째 딸이 살고 있는 마을의 불빛이 보였다. 그러나 어머니는 눈길에 풀썩 쓰러지고 막내를 애타게 부르다가 끝내 숨을 거두었단다.'

  나는 여기까지 읽었으나 더 읽지 못하고 참았던 울음이 터져 나왔다. 뒷머리에 뜨거운 물을 끼얹은 듯 목젖이 아려오며 통곡하듯 울었다.

  딸 셋을 혼자 키우며 그간 잊고 살았던 갖가지 힘들었던 날과 내면의 갈등으로 걷잡을 수 없었던 황폐감이 서럽게 밀려왔다.

  첫딸이 태어나고 얼마 되지 않았을 때, 친정어머니가 오셨는데 내 수중에는 돈이 한 푼도 없었다. 어머니는 나를 보고 꼬챙이처럼 말랐다며 속상해 돌아가시는데 차비를 드리지 못했다. 십 리나 되는 길을 행여 걸어가시지는 않았을까 싶은 생각에 두고두고 마음이 아팠다. 밖으로 도는 남편으로 인한 괴로움과 삶의 무게가 늘 버거웠지만 나는 마음에 다짐하기를 '내게 주어진 운명을 받아들여 아무리 어려운 일이 닥쳐도 딸 앞에서는 눈물을 절대로 보이지 말자' 맹세하였다. 그 후 살면서 눈물이 나면 하늘을 쳐다보고 마음을 다잡아 눈물을 삼켰다. 그렇게 평생을 참았던 울음이 오늘, 제 설움에 겨워 봇물처럼 터졌다. 지금은 동화처럼 못된 딸을 둔 것도, 궁핍한 처지도 아닌데 나의 이 설움은 어떤 의미인지 모를 일이다.

  나는 가진 재능과 기술이 없었다. 궁여지책으로 지인의 권유가 있어 커피자판기를 사서 회사나 빌딩 등에 설치하여 10년 넘게 운영하며 세 딸을 키웠다.

  그런데 정수기가 나오면서부터 자판기 사업도 사양길에 접어들어 사업을 접었다.

  내가 자판기를 운영할 때에는 딸의 나이도 어리고 풍족하진 않았지만 행복한 어린 시절의 추억이 되게 하려고 나름대로 애썼다. 딸들에게 주는 엄마로서의 교훈도 명확했다. "엄마도 열심히 사니 너희도 각자 자기 일에 열심히 살아야 한다. 집에서는 밥에 찬이 없어도 남들이 모르니 절약해서 살고 밖에서는 궁상을 떠는 사람이 되지 말라. 거짓말 하지 말며 정직한 사람이 되라." 나는 딸 뿐이니 이렇게 일렀다. "너희가 결혼하면 여우하고는 사나 곰하고는 못 산다는 말이 있으니 항상 타인에게 감정을 드러내지 말고 상냥하라. 습관이 되면 성격이 되고 인격이 된단다."

  한 달에 한 번은 좋은 레스토랑을 찾아다니며 외식이나 피자도 사 먹고 우리 가족은 서로를 격려하며 살았다. 그러면서 큰 딸을 출가시켰다. 

  자판기 사업을 접고 나는 벌기 위해 이런저런 일들을 벌여보았지만 하는 사업마다 실패의 연속이라 빚은 스스로 감당하기 힘든 지경에 이르렀다.

  자본이 들지 않는 방법을 모색하던 중 간병인 교육을 한 달 받고 일을 시작한 지 약 4년쯤 된 어느 날 아주 힘든 노인의 간병을 맡았다. 한 달 계약의 일을 마치고 혹사한 내 몸의 피로를 풀 겸 여동생이 살고 있는 공기 좋은 여주로 갔는데 10일이 지나도 내 몸은 회복되지 않았다.

  나는 깊은 생각 끝에 간병 일을 그만두고 간병과 반대 되는 출산의 일을 해보자 하여 산모 도우미 교육을 한 달 또 받아 일을 하였다.

  그즈음 둘째 딸이 대학에 들어가고 나는 몇 년 고생에 빚을 다 갚을 때까지, 둘째 딸은 대학 4년 내내 고생하였다.

  재학 중에도 아르바이트를 하였으며 율무차 한 잔으로 점심을 때우는 일이 많아 연한 배같이 부드러운 성향의 딸은 그때 끼니를 많이 걸러서인지 지금도 몸이 약하다. 딸은 대학 졸업 후 자립으로 캐나다에 어학공부를 하러 가고 나는 막내를 잘 돌봐주질 못해 가슴이 아팠지만 그나마 빚을 다 갚을 수 있었다.

  우리 가족은 고생 중에서도 매사에 긍정적으로 자기 일을 열심히 하자며 서로를 격려했다. 파란만장한 내 인생 한 단락이 끝나게 된 것은 둘째 딸이 결혼하면서부터다. 손자가 태어나던 날 둘째에게 빚이 많은 나는 손자 돌보아주기를 자청했다. 딸 셋은 다행히 제 앞가림을 할 줄 알며 예(禮)와 지(智)를 웬만큼 갖춘 숙녀들이 되었다.

  나도 이제 할머니가 되었고 손자를 보며 안정된 노후에 「할미꽃」동화를 읽어주다 '절대로 울지 말자'던 나의 맹세를 잊고 서럽게 울었다. 이제 내가 허리를 졸라맬 시기도 아니니 나도 한 번은 마음 놓고 섧게 울어도 좋으리라.

  손자가 나를 흔든다. "할머니! 정신 좀 차리세요. 여기 휴지 있어요." 할머니가 갑자기 우니 손자가 영문을 몰라 한다. "할머니, 동화책 끝까지 읽어주셔야죠?"라고 말하기에 나는 도로 책을 들었다.

  '며칠 후 막내딸은 고갯마루를 넘다가 눈 속에 싸늘하게 굳어버린 어머니를 발견하고 슬퍼하며 양지바른 곳에 묻어드렸다. 따뜻한 봄이 오고 무덤을 찾은 막내딸의 눈에 난생 처음 보는 꽃이 활짝 피어 있었다. 생전의 어머니를 닮아 등이 굽은 꽃을 이후 사람들은 할미꽃이라 불렀단다.'라며 책 읽기를 마쳤다.

  문득 내가 여주로 자주 다닐 때의 생각이 겹친다. 농원 옆 양지바른 언덕에 무덤 두 개가 나란히 있었다. 이른 봄이면 무덤가에 흰 털을 쓰고 허리 굽은 짙은 보랏빛 할미꽃이 여기저기 피었고, 가을이면 키 작은 큰 잎 흰 구절초가 온 무덤을 덮었다.

 

  요즘의 나는 자식과 손자를 돌보는 가사 일로 일과가 끝나면 무척 피곤하다. 때론 너무 피곤하여 진 크레이그헤드 조지 작(作) 「나의 산에서」의 샘그리블리처럼 누구나 청소년기에 한 번은 가출하고 싶은 마음같이 나도 세상 아닌 숲으로 도망가고 싶을 때가 있다. 그러나 요즘은 만만한 세상이 아니다. 부부가 벌어야 하는 현실에서 내가 딸을 돌보아주지 않으면 누가 돕겠는가. 젊은이들의 손이 미치지 않는 곳에서 힘이 되어주고 싶은 것이 부모의 심정이다,라고 내게 위로한다.

  언젠가 TV에서 주부가 집을 나가 방을 얻고 자기만의 공간에서 책을 보며 그간 하고 싶었던 일을 해보는 드라마가 있었다. 친구들은 용기 있는 주인공을 부러워했다. 그러고 보면 고단한 삶을 살았던 우리 세대 부모의 공통된 희망사항인 듯하다.

  어제 손자가 사위에게 "아빠, 할머니 말씀을 잘 들으면 자다가도 떡이 생긴대요. 떡 생기면 아빠, 엄마, 할머니, 이모랑 나눠 먹자요."라고 말했단다. 우리는 배를 잡고 웃었다. 이렇듯 사랑하는 가족은 내게 큰 기쁨이며 보람이다.

  인간은 누구나 존재 의미가 있다 한다. 고난에 비례한 인간의 성숙함도 때로는 값진 소득이리라. 모든 것은 역시 마음가짐이 아닌가 싶다.

 

  언젠가, 여주의 그 온화한 양지바른 언덕에서처럼 나도 편안한 사후에는, 햇살 좋은 봄날은 할미꽃으로, 가을이면 흰 구절초로 피어 초목의 풍경화가 되어 있지는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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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가온문학 』 2016-봄호, <봄 수필>에서

  * 송정연/ 한국문인협회, 광나루 문학회, 가온문학회 회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