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세이 한 편

숲, 그 오래된 도서관/ 김영식

검지 정숙자 2016. 1. 20. 23:40

 

 

    숲, 그 오래된 도서관

 

    김영식 / 시인

 

 

  삐걱, 숲의 문을 떠밀면 꽃과 나무들이 수백만 권 푸른 장서가 된다. 오솔길 하나 고즈넉하게 걸어오고 어디선가 차르르! 책장 넘기는 소리도 들려온다. 천천히 주위를 둘러보니 고마리며, 쑥방망이, 꽃향유들이 길가에 가지런히 피어있다. 새로 발간된 문고판처럼 귀엽고 앙증맞다. 어디 꽃들의 책뿐이랴! 박달나무, 층층나무, 굴참나무들이 온고지신(溫故知新), 초록 위에 단풍을 덧얹고 산등성이에 고요욯히 펼쳐져 있다.

  이때쯤이면 으레 늙은 사서(司書)가 내 앞에 나타난다. 이 숲의 사서는 오랜 지인이지만 그의 나이는 종내 가늠할 수 없다. 내가 태어나기 전부터 이 숲에 살았다 하기도 하고 또 어떤 사람은 세상 어디에도 있는 이라고 얘기한다. 그러나 그런 건 아무래도 상관없다. 그는 나뿐만 아니라 산을 찾는 모든 이에게 두루 친절하기 때문이다. 인자요산(仁者樂山)이라 했던가? 품성이 온화한 사서는 어느 때 찾아가도 반가운 표정으로 산 구석구석을 안내해준다.

  산 중턱에 이르자 먼저 온 사람들이 땀을 식히며 쉬고 있다. 어떤 이는 산국(山菊)을 읽기도 하고 또 어떤 이는 서어나무를 휘감고 올라가는 다래덩굴을 읽기도 한다. 빛나는 문장을 들려주려고 아침이슬로 부지런히 몸을 닦는 꽃, 나무들의 수런거림. 추사 김정희는 문자향(文字香)이라 했다. 무릇 글에는 향기가 있어야 한다고 했으니 숲속 도서관엔 저마다 향기 나는 글로 가득 차 있는 것이다.

  계곡이 행간처럼 깊어지는 골짜기에 느릅나무 군락지가 있다. 잠시 흐트러진 호흡을 고르며 그중 나이가 가장 지긋해 보이는 나무 곁에 나를 앉힌다. 울퉁불퉁한 회색의 껍질이 상형문자 같다. 가만히 들여다보면 오래된 나무일수록 옹이가 맍다. 옹이는 나무가 삶의 질곡을 넘을 적마다 그어놓은 밑줄일 것이다. 어떤 곳은 굵게 또 어떤 곳은 깊게 새겨진 자기성찰의 흔적들. 단단하고 서늘한 기전체의 문장을 읽는다. 라코타 인디언은 살면서 힘든 고비를 넘을 때마다 할머니에게 길을 묻는다고 한다. 할머니가 살아온 삶의 궤적이야말로 우리를 인도하는 빛나는 지혜의 책이기 때문이다. 오래된 나무는 모두 할머니를 닮았다.

  다람쥐가 가지 끝에 앉아 잣나무를 정독하고 있다. 산비둘기는 가까운 듯 먼 곳에서 "구구 없어도!"하고 아침 산을 읽는다. 다람쥐와 산비둘기는 이 숲 도서관의 부지런한 애용자다. 매일 숲에서 생활하니 독서가 심오할 것이다. 그에 비하면 나는 일주일에 한 번 정도 산을 찾으니 아무레도 그들보단 독서가 얕은 게 사실이다. 두보(杜甫)는 남아수독오거서(男兒須讀五車書)라 했다. 모름지기 학문하는 자는 다섯 수레에 가득 찬 책을 읽어야 한다는 것이다. 다섯 수레의 책은 대략 오천 권 분량이라 하니 제대로 된 한 줄의 문장도 어려워하는 것이 전적으로 내 독서량에 상관되는 것 같다. 

  감어인(鑑於人)은 다른 사람에게 자신을 비추어보라는 말이다. 자연이야말로 사람의 모습을 비추는 가장 훌륭한 거울이 아닐까! 자연 앞에 서면 우리는 한없이 겸손하고 낮아진다. 그러니 감어자연(鑑於自然)이라고 해야 맞는 말일 것이다.

  고금(古今)의 문장으로 가득 찬 숲은 현자(賢者)다. 세상의 모든 책들은 숲에서 비롯된 것이라는 친절한 사서의 설명을 듣지 않아도 책의 역사는 고대 이집트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기원전 2,500년경의 파피루스에서부터 대나무, 닥나무, 지금의 펄프까지 책의 재료인 종이는 모두 나무나 풀에서 기원했다. 그러니 이 도서관의 책들이야말로 완벽한 원서(原書)인 것이다. 햇살이 따가워지자 느릅나무가 몸속에서 시원한 그늘멍석을 꺼내 발아래 깔아준다.

  한 무리의 사람들이 산을 내려간다. 오늘은 저마다 어떤 책을 읽고 세상의 마을로 돌아가는 것일까? 노랑턱멧새 한 마리가 "츄이!" "츄이!" 소리를 내며 물푸레나무 우듬지를 떠나 구름의 이마까지 솟아오른다. 저마다 가슴 속에 푸른 책 한 권씩 품고 가는 사람들의 뒷모습이 가을 햇살처럼 따뜻하다. 바람결에 은은한 향기가 건너온다. 오늘의 독서를 끝내고 내려가는 길, 뒤돌아보니 늙은 사서가 오래도록 손 흔들며 배웅하고 서 있다.                   

 

 

 * 산문집『부록에 관한 세 가지 옴니버스』에서/ 2016.1. 2.<도서출판 포엠포엠POEMPOEM>펴냄

 * 김영식/ 경북 포항 출생, 2007년 《강원일보》《동양일보》신춘문예, 2007년『현대시학』으로 등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