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날의 일기]당나귀 귀를 가진 대나무 숲
김준현
어제까지의 문장이 종이와 글씨의 교배로 태어난다고 믿었다. 그날의 글씨의 기분과 종이의 기분이 나를 좌우한다고 생각했다. 흑과 백으로 나뉜 세계를 통일시키는 주체가 된 자의 우월감 같은 같은 것, 언어는 길들여지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처음 시를 쓰던 때만 해도 나는 나만이 알고 있는 진실이라면 반드시 나만이 쓸 수 있는 어떤 문장으로 나올 거라고 믿었던 것 같다. 물론 모든 믿음은 실재와 상관없이 효력을 발휘하기에 그 믿음은 내게 한때를 살아갈 힘이 되기도 했고, 편협하지만 힘이 들어간 시가 되기도 했다.
오늘부터는 다른 걸 믿는다. 임금님 귀가 당나귀 귀임을 최초로 유일하게 알았던 왕의 이발사의 내면 같은 것이다. 비밀은 말할 수 없을 때 태어난다. 입이 막혀 있는 상황에서 발설하고자 하는 욕망이 대나무 숲의 목소리를 만든다. 대나무를 다 잘라 내어도 목소리가 남아서 임금님 귀가 당나귀 귀라는 사실을 외치는 것처럼, 죽은 시인 대신에 남아 있는 죽은 시인의 목소리만큼 생래적이고 끈질긴 것은 없다. 그게 아마 한국 근현대사의 길었던 시간 동안 통제되었던 말과 글이 외려 힘을 얻을 수 있었던 이유라고 믿는다.
*『무크 파란』0001호(2015.10.30.)/ 'essay'에서
* 김준현/ 2013년 《서울신문》을 통해 시 등단
'에세이 한 편' 카테고리의 다른 글
숲, 그 오래된 도서관/ 김영식 (0) | 2016.01.20 |
---|---|
병아리 떼 종종종/ 장승리 (0) | 2016.01.08 |
인생에는 이듬해가 없다/ 정숙자 (0) | 2015.12.31 |
백두산 전투의 기억과 6.25/ 박승병 (0) | 2015.12.15 |
깨진 그릇/ 임상기 (0) | 2015.12.1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