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고 시인의 시

김춘식_여행, 풍경, 그리고 책 읽기(발췌)/ 여행자 : 기형도

검지 정숙자 2015. 12. 31. 00:32

 

 

  『문학사상』2016-1월호 <고전에 길을 묻다/ 여행, 풍경, 그리고 책 읽기(발췌)_김춘식

 

 

    여행자

 

    기형도(1960~1989, 29세)

 

 

  그는 말을 듣지 않는 자신의 육체를 침대 위에 집어던진다

  그의 마음 속에 가득 찬, 오래된 잡동사니들이 일제히 절그럭거린다

  이 목소리는 누구의 것인가, 무슨 이야기부터 해야 할 것인가

  나는 이곳까지 열심히 걸어왔었다. 시무룩한 낯짝을 보인 적도 없

  오오, 나는 알 수 없다, 이곳 사람들은 도대체 무엇을 보고 내 정체

를 눈치챘을까

  그는 탄식한다. 그는 완전히 다르게 살고 싶었다. 나에게도 그만한

권리는 있지 않은가

  모퉁이에서 마주친 노파, 술집에서 만난 고양이까지 나를 거들떠보

지도 않는다

  중얼거린다, 무엇이 그를 이곳까지 질질 끌고 왔는지, 그는 더 이상

기억도 못한다

  그럴 수도 있다, 그는 낡아빠진 구두에 쑤셔 박힌, 길쭉하고 가늘은

  자신의 다리를 바라보고 동물처럼 울부짖는다, 그렇다면 도대체 또

어디로 간단 말인가!

                    -『입 속의 검은 잎,』문학과지성사, 1989.p_34

 

 

   ▶고전에 길을 묻다】여행, 풍경, 그리고 책 읽기(발췌)_ 김춘식

  인간이 시간적 · 공간적인 한계를 뛰어넘는 가장 대표적인 행위가 글쓰기라면, 여행은 한계적 인간에 대한 재인식과 그 실존의 비애, 애수를 가장 철저하게 깨닫게 한다. 그래서 여행은 언제나 한계 속에 갇힌 '비애의 실천'이고 그 비애와의 '정직한 대면'은 다시 글쓰기를 필요로 한다. 글쓰기가 결핍에 대한 보상 혹은 대리충족성을 지니기 때문에, 육체적인 실존의 한계성에 대한 자각으로 끝나는 '여행 후'의 비애와 허무는 문학적인 글쓰기 · 인식의 탐구로 전이되는 것이다. (p-72) 

  여행의 끝에서, 돌아오지 않은 사람이 있다면, 그는 비로소 자신의 환각의 고리를 끊은 것일까.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들은 '여행'을 통해 환각과 피로의 사이를 끊임없이 반복한다. 그래서 정지용이 시 <백록담>에서 "뻐꾹채 꽃키는 아조 없어지고  팔월 한철엔 흩어진 성진처럼 난만하다. 산 그림자 어둑어둑하면 그러지 않아도 뻐꾹채 꽃밭에서 별들이 켜든다. 제 자리에서 별이 옮긴다, 나는 여기서 기진했다"라고 말할 때의 그 기진함, 피로는 모두 설렘과 환각의 '이면(裏面)'이라고 할 것이다. 그래서 '제자리에서 별이 옮'기는 환상과 그에 대한 당황스러움이 야기하는 '기진함'이 맞물리면서 여행은 '귀환'으로 쉽사리 종결되지 않는다. 그래서 여행을 통해 '나를 찾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나(ego)의 환상을 깨는 경우에도 마침내는 '기진함과 피로함'을 통한 새로운 인식이 밀려오는 것이다. 『새들은 페루에 가서 죽다』처럼 여행지의 끝에서 마침내 모든 희망을 부정하는 주인공의 이야기도 이런 부류에 들어갈 것이다. (p-74)

  도대체 어디로 간단 말인가! 그의 최후의 휴식처는 어디인가? 인생이라는 여행지의 끝에서 바라보는 마지막 풍경이란 막막함이 아니고 달리 무엇이 될 수 있을 것인가. (p-75)          

                                                          

                                                                              

    * 김춘식(金春植)/ 동국대학교 문예창작학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