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와표현』2016-1월호
-다시 읽고 싶은 시와 산문의 에스프리
-80년대 시집 다시 읽고 싶은 평론
-박남철 시집 『地上의 人間』해설: 김병익「詩, 혹은 진실과 현실 사이」/김상미 옮김
시인의 집 · 뒤
박남철(1953~2014, 61세)
밤 새 내린 눈이 하아얗다
어제 오후 내내 심각하던 하늘이
마침내 읊어 놓은 이 감격(感激)
화장실(化粧室) 앞에 이리저리 검둥이 발자국이 어지럽다
어지럽다, 온 세상이 하얗다
새벽에 잠들어 오후에 깨는
나는 시(詩)라는 이름의 병(炳) 앓는 사람
오래간만에 하늘이 내려준 축복에 행복하게 잠들 수 있었다.
꿈속에서 어느 눈 덮인 산장(山莊)에서 구약(舊約)을 읽고 있노라니
에이프런을 두른 하얀 소녀가
양고기를 튀겨
들고 나왔다
자, 드세요…세요…요…오
배가 고파 잠을 깨니
앞집 지붕은 그대로 허연데
하숙집 마당은 싹 치워져 콘크리트 바닥이 드러나 있었다.
담배를 사려고 대문을 나서니 골목이 홍해처럼 갈라졌다.
………………
역시, 너무 시적(詩的)인 것은, 거부당하는 이 생활의 공간이여
먼산의 눈이 아름답고
적(敵)이 아닌 유태인(猶太人)이 위대한 것
도시(都市)의 눈은 백해 무익하다는
도시 공학도의 말이
생각났다
박남철의 시로서는 그 표현법이나 의식에 있어 거의, 비틀거나 뒤틀지 않은 몇 안 되는 시 중의 하나인 「詩人의 집 · 뒤」는 그 절제되고 온건한 묘사를 통해, 그러나 그의 심상과 고뇌의 원 출발점이 어디에 있는가를 아주 잘 보여주고 있다. "밤 새 눈이 하아얗다"는 매우 범상한 첫 행은, "어제 오후 내내 심각하던 하늘이/ 마침내 읊어 놓은 이 感激"이라는 결코 범상치 않은 다음 연의 두 행에 의해 새삼스런 정경을 이루어 놓는다. 시인이 밤새도록 심하게 앓아가며 시와 씨름하다가 새벽에 겨우 잠들어 느지막이 깨어났을 때 문득 발견하는 이세계의 화려한 변모! 이때 받게 되는 시인의 '감격', 그 감격은 어제 오후의 독하게 짜푸렸던 하늘 때문에, 그리고 어젯밤의 고통스런 시 작업 때문에 더욱 클 수밖에 없는 것이고 화장실에 다녀오며 본 온 세상의 하얌은 현기증이 날 정도이다. 그래서 그는 뿌듯하게, '축복'과 '행복'을 감히 말할 수 있었다. 이 따뜻한 행복감은 꿈속에서도 계속되어, 시인은, 아마도 스위스쯤의, 우리가 꿈꿀 만한 아름다운 "눈 덮인 山莊"에서 구약성서를 평화로이, 깊이 그 뜻을 음미하며 "에이프런을 두른 하얀 소녀"의 접대를 받는 행복한 꿈을 꾸게 된다. 물론 잠에 취해 그는 점심을 걸렀을 것이기 때문에 꿈속에서도 "양고기"를 보았겠지만, 마침내 배가 고파 잠에서 깨어난다. 그리고 창밖으로 내다본 마당에는 눈들이 깨끗이(그러나 더럽게) 치워져 있었다. 담배를 사기 위해 나선 "골목이 홍해처럼 갈라졌다"는 뛰어난 구절은 "구약"과, 그 다음의 "유태인"을 잇는 정경의 묘사이지만, 이 시행의 이중적 의미는 이 시의 서두 인용 "진실과 현실 사이에 시는 존재하는가"의 비관적 전망을 육화시킨 삼상의 표현이다. 모세는 이집트 노예 생활에서 유태인을 구하기 위해 홍해를 갈라 탈출했고 그래서 가나안 복지로 향했었다. 홍해의 사잇길은 그러므로 꿈과 진실을 향해 가는 길이다. 그러나 이 시의 시인은 꿈에서 콘크리트의, 눈이 치워진, 따라서 축복과 행복이 가시어진 현실의 거리로 나서야 했다. 그 차이가, 비록 적개심을 가지고 보아야 할, 그럼에도 부인할 수 없는 유태인의 "위대함"과의 차이이다. 현실은, 너무 詩的인 것을 거부하는 생활공간인 것이다! 아니, 눈은 먼산에 덮여 있을 때는 아름다운 것일지 몰라도, 도시에서는 "백해 무익하다"는 것이다.
"진실과 현실 사이에 詩는 존재하는가"라는 긍정적 의문형의 진술에서 시인 박남철에게 지시되는 것은, 시인으로서의 그의 고뇌가 현실에서 진실로 헤쳐 나가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진실에서 현실로 떠밀침을 당하고 있다는 점이다. 그것은 시적 진실을 탐구하는 상승적 내면의식이 아니라 시적 진실(이 시에서는 그것이 '하얀 눈'의 이미지를 받으면서 '축복'과 '행복'이란 어사의 지지를 받고 있다)의 세계에서 추잡한 현실로 추락 · 축출(이 시에서는 그것이 '배고픔'의 실제로 나타나면서 콘크리트의 이미지와 "백해 무익하다는/ 도시 공학도의 말"로 설명되고 있다)되는 하강의 움직임을 뜻하고 있다.(※일부 발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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