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고 시인의 시

권성훈_고독한 언어의 횡단자, 멜랑콜리커 김현승/ 어린 새벽은 우리를 찾아온다 합니다: 김현승

검지 정숙자 2015. 12. 24. 01:54

 

 

     【한국 시단의 별들】평론 : 권성훈_'고독한 언어의 횡단자, 멜랑콜리커 김현승' (발췌)

  

 

     어린 새벽은 우리를 찾아온다 합니다

 

      김현승(1913~1975, 향년 62세)

 

 

  새까만 하늘을 암만 쳐다보아야 어딘지 모르게 푸르렇더니

  그러면 그렇지요, 그 우렁차고 광명(光明)한 아침의 선구자(先驅者)인 어린 새벽이

  벌써 희미한 초롱불울 들고 사방(四方)을 밝혀가면서

  거친 산(山)과 낮은 들을 걸어오고 있었읍니다그려!

  아마 동리에 수탉이 밤의 적막(寂寞)을 가늘게 찢을 때

  잠자던 어느 골짜기를 떠나 분주히 나섰겠죠.

 

  여보세요. 당신은 쓸쓸한 저녁이 올 때 얼마나 슬퍼하였읍니까?

  당신이 사랑하는 해가 거친 산정(山頂)에서 붉은 피를 쏟고

  감상시인(感想詩人)인 까마귀가 황혼(黃昏)의 비가(悲歌)를 구슬피 불러

  답답한 어두움이 방방곡곡(坊坊谷谷)에 숨어들 때

  당신은 끊어져 가는 날의 숨소리를 들으며 영원(永遠)한 밤을 슬퍼하지 않

았습니까?

  그러기에 당신은 또한 절망(絶望)을 사랑하기에 경솔(輕率)하고,

  감정(感情)을 달래기에 퍽도 이지(理智)가 둔(鈍)하였다는 말이지요.

  지구(地球)의 구석까지 들어 찰 광명(光明)을 거느리고, 용감(勇敢)스러운 해는

  어둡고 험준(險峻)한 비탈과 절망(絶望)을 또다시 기어오르고 있다는 걸요,

  이제 그 빛난 얼굴을 동방산(東方山) 마루에 눈이 부시도록 내어 놓으면

  모든 만물(萬物)은 환호(歡呼)를 부르짖고

  새로운 경륜(經輪)을 이루어 나간다 합니다.

  힘있고 새로운 역사(歷史)가 광명(光明)한 그 아침에 쓰여진다 합니다!

  저것 보아요. 어두운 밤을 지키고 있던 파수병정(把守兵丁)인 별들은 이제 쓸

데없고요.

  그리고 당신이 작은 낙천가(樂天家)라고 부르는 고 얄미운 참새들이

  어느새 해를 환영(歡迎)하겠다면서 어린 이슬들이 밤새도록 닦아놓은

  빨래줄 위에 아주 저렇게 줄지어 앉았겠죠.

  평생 지껄여야 무슨 이야기가 저렇게도 많은지.

 

  그러면 글쎄, 참새들은 지금

  이른 아침 새벽 정찰(頂察) 나온 구름의 이야기를 하고 있읍니다그려!

  저걸 좀 보아요. 우렁차고 늠름한 기상을 가진 흰 구름들이 동방(東方)에

서 일어나

  오늘은 벌써 서부원정(西部遠征)의 새벽 정찰(頂察)을 하고 있지 않습니까?

  지나간 여름에 저 구름들이 황하연안(黃河沿岸)을 공격하였을 때

  너무도 지나친 승리(勝利)를 하였다고 합니다그려.

  그러니 어찌, 감상시인(感想詩人)인 까마귀들만이 그냥 있을 수 있어야지요.

  아마 황혼(黃昏)에 읊을 시재(詩材)를 얻기 위(爲)하여 지금 저렇게 산(山)을 넘어

  거칠고 쓸쓸한 광야(曠野)로 나가는가 봐요.

 

  동(東)편에선 언제나 가장 높은 체하는 험상궂은 산(山)봉우리가

  아직도 해를 가리우며 내어 놓지를 아니하는데

  그 얌전성 없는 참새들은 못 기다리겠다고 반뜻한 줄을 흩으리고

  그만 다들 날아가 버리겠지요.

  그러나 그 차고 넘치는 햇발들이 사방(四方)으로 빠져 나오고 있지 않습니

까?

  그러기에 어제밤 당신을 보고 말하지 않았습니까?

  밤을 뚫고 수천(數千) 수백리(數百里)를 걸어 나가면 광명(光明)한 아침의 선구자(先驅者)인 어린

새벽이

  희미한 등불을 들고 또한 우리를 맞으려 온다고 말하지 않았습니

까?

 

 

  「어린 새벽은 우리를 찾아온다 합니다」에 나타난 새벽은 의인화된 선지자의 모습으로 온다. 선지자는 화자의 이상향이며 어둠을 밝히는, 빛이 물질화된 것이다. "우렁차고 광명(光明)한 아침의 선구자(先驅者)인 어린 새벽이/ 벌써 희미한 초롱불울 들고 사방(四方)을 밝혀가면서 거친 산(山)과 낮은 들을 걸어오고 있었읍니다"라고 식민지에서 광명을 견인하는 것은 '어린 새벽'이다. 어린 새벽이 전부터 희미한 초롱불을 들고 사방을 밝혀 가면서 찾아오고 있다는 시적 언술이다. 이렇게 아침은 밤을 건너온 어린 새벽의 운동성에 대한 발아이다. 그러나 어린 새벽은  '거친 산(山)'과 '낮은 들'을 걸어오는 '고독한 존재'이면서 '광명한 아침의 선구자'다. 이것은 예수가 사형당하기 전날 밤(마가복음 14장 32-42절)의 이미지인 '쓸쓸한 저녁' '수탉' '산정' '붉은 피' '끊어져 가는 날의 솜소리'를 통해 예수의 고독을 상상하게 한다. 또한 어린 새벽의 희생으로서 절망에서 희망으로 치환된다. 희생은 예수의 수난처럼 제의적 성격을 동반하고 있다. 세상에 대한 밝은 전망은 성경의 이미지인 '어린 새벽의 죽음'-'예수의 죽음'으로 동일화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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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월간『시와표현』2015-12월호 < 한국 시단의 별들>에서

 * 김현승(金顯承)/ 1913.4.4.~1975.4.11. 호 남풍(南風) · 다형(茶兄). 평안남도 평양(平壤) 출생으로 목사인 부친을 따라 7세에 전라남도 광주(光州)로 이주. 그곳에서 숭실(崇實)중학과 숭실전문 문과를 졸업. 교지에 투고한 「쓸쓸한 저녁이 올 때 당신들은」이라는 시로 양주동(梁柱東)의 인정을 받아 《동아일보》에 발표(1934)됨으로써 시단에 데뷔. 일제 강점기 말에는 붓을 꺾고 침묵을 지키다가 8.15광복 후 1949년부터 다시 작품을 발표. 1957년에 처녀 시집 『김현승시초(金顯承詩抄)』를 간행하고, 1963년에 제2시집 『옹호자(擁護者)의 노래』, 제3시집『견고한 고독』, 1970년에 제4시집『절대고독』을 간행하였다.

  * 권성훈/ 2013년 『작가세계』로 평론 등단. 시집『유씨 목공소』외. 저서『시치료의 이론과 실제』『폭력적 타자와 분열하는 주체들』외. 편저『이렇게 읽었다-설악 무산 조오현 한글 선시』외. 현 경기대 초빙교수.